안녕하세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인사드립니다.
이태석 신부님 선종 10주기를 보내는 올해, 신부님과 관련된 아주 개인적인 소중한 경험을 되짚어 보게 됩니다.
2008년 무렵, 신부님께서 휴가차 한국에 오셨을 때 수녀원을 방문해 현지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에게 강하게 남은 건 ‘선교지에 얼마나 큰 희망이 넘치는가!’였습니다. 직접적으로 이 말씀을 언급하진 않으셨지만, 신부님 덕에 선교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신념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과 함께하며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고자 했던 것이 이때까지의 순수한 열망이었다면, 선교지 사람들의 희망을 읽어내고 함께 키워가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삼게 된 것입니다. 그날 저녁, 깨달음의 순간에 느꼈던 떨림은 지금 이곳 캄보디아에서의 삶에, 또렷한 좌표가 되었습니다.
올해 2월 말 코로나19가 대유행하기 직전,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6월 초 캄보디아에 돌아와 보니 이곳도 코로나19의 여파로 생활 모습이 이미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모든 학교는 3월 말 문을 닫았고,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정상수업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입니다. 교육청에서는 TV 채널과 온라인 수업을 장려하지만, 캄보디아의 생활여건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공장이 기계 가동을 멈췄고, 앙코르와트 관광 역시 침체한 터라 관련 일로 생계를 잇는 수많은 사람이 실직한 상황입니다.
현재 돈보스코 뚤꼭 직업센터도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학생들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어 1학년은 70%, 8~9월 인턴십 후 학사과정을 마치는 2학년은 거의 98%의 온라인 출석률을 보입니다(스마트폰은 이곳에서도 필수품, 액정이 깨져있거나 오래된 중고품이어도 여기서는 충분한 기능을 합니다). 다만 인터넷 사용료가 문제였는데 요즘 통신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1주일에 1달러로 요금이 낮아져 걱정을 덜었습니다. 물론 인터넷 속도가 속을 썩이거나 다양한 가정환경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선생님이 온라인 수업 중에 문제를 내고 답을 종이에 적어 화면으로 보여 달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땅에 답을 적어 비췄다고 합니다. 소몰이하느라 들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든 환경에서도 수업에 참여하려 부단히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은 늘 마음을 아련하게 합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함께한다는 이 작은 몸짓들이 참으로 기특하고 우리에게 큰 용기를 줍니다. 아이들 스스로 지닌 희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문을 닫는 동안 우리는 가정방문을 차분히 진행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요즘 수녀회를 통해 각국에서 온 긴급 구호물품들을 주변 가난한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정방문 때 지방에 흩어져 사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물품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약자들이 받는 경제적인 타격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부모 모두 태국에서 일하다 일자리를 잃고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 가정이 있습니다. 당장 먹을거리조차 구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에게 서둘러 구호물품을 전했습니다. 쓰레기 매립장 주변에 사는 가족을 방문했을 때 “코로나보다 배고픔이 더 두렵다.”고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아이에게서 우리는 단단한 힘을 보았습니다.
2학년 아이들은 9월까지 인턴십에 참여합니다. 현장에서 직무를 실습한 후, 일부 친구들은 정식 직원이 되어 같은 곳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인턴십 준비를 위해 3개월 만에 만난 아이들은 농사일을 돕느라 하나같이 야위고 까맣게 그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새로운 사회에 발을 내디딘다는 것에 꽤 들떠 있었습니다. 정부가 아직 기숙사 운영을 허가하지 않아 실습을 위해서는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야 하는 큰 숙제가 있었음에도 아이들은 “수녀님, 저희가 잘 해낼 수 있어요!”라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동행한 인터뷰에서 만난 어느 대기업 인사과 직원은 자신도 살레시오회에서 운영한 돈보스코 칠드런 펀드의 장학생이었다며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7월에 일찍 인턴십을 시작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의 성품과 실력, 적극적인 태도에 만족해서 직원으로 채용할 친구들을 더 추천해달라는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휴가 후, 몇 개월 만에 다시 만난 캄보디아와 이곳 아이들의 삶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습니다. 전보다 더 어려워진 상황과 학교와 기숙사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깝고 안쓰러웠습니다. 하지만 오롯이,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아이들과 새로운 세계에 자신 있게 도전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연이어 떠올랐습니다. 매우 기특하고 고맙기만 했습니다. 다음 주엔 인턴십 중인 2학년들의 실습 나눔을 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첫 사회생활이 어땠을지 몹시 궁금하고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기대가 큽니다.
7월 27일에는 살레시오 집의 전통인 감사축일 행사가 열렸습니다. 올해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온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아쉽게도 전체 아이들의 절반만 참석했지만, 모두 함께했던 시간에 감사하며 그때를 그리워했습니다. 각자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에 대해 꾸밈없이 이야기하고, 순수하게 표현하는 아이들 덕분에, 가슴 찡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우리의 일상을 거의 모두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희망을 길러내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살레시오 수녀로서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아이들의 지긋한 힘을 뒷받침해주시는 수단어린이장학회에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홍미나 따시아나 수녀 /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