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하는 자
성경은 자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예를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 이야기에서 보여 준다. 그는 현실에 안주한 채, 어떠한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대표한다. 우리는 손으로 서로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손으로 물건을 움켜쥐기도 하고 무엇을 만들기도 하며 창조적인 작업도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마르 3, 1-6)은 손이 오그라들었다. 그는 어떤 모험도 감행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자기 의견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들은 의견을 내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 든다. 그들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어떤 의견이 지배적인지 살핀 다음 거기에 따르는 입장을 취한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이 어떤 요청을 해와도 ‘못한다’라고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그들을 아무런 색깔도 지니지 못한 사림으로 만든다. 결국 그들은 진정한 사귐이 불가능해진다. 모든 것에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다 삶에서 실질적인 부분을 잃고 만다.
안주하는 태도의 근본 원인은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관심에만 의존하는 데 있다. 이런 처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하고 수용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들은 어린 시절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받아들여진 적이 없으며 언제나 고분고분하거나 착하게 행동했을 때만 비로소 인정받았기에 성장해서도 그처럼 행동하려 애쓰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건 없이 인정받거나 수용되는 체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개발한다. 즉, 어떤 일을 성취해 내거나 말썽을 부리지 않고 순응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에 지나지 않는다(Karl Frielingsdorf. Vom Überleben zum Leben. Mainz l989).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늘 긴장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수용되기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절당할까 봐 늘 걱정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자신과 관련지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들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그들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한 번쯤은 수용되기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깊은 갈망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바깥만 내다보는 삶은 실제 삶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을 그 사람의 생각에 맞추려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말할 용기도 내지 못한다. 예수님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을 다음 말로 치유하신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 3)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속에 자신을 숨길 수 없다. 모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참모습을 내보여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서 있어야 한다. 이제 그의 모든 면면이 자세히 검열을 받는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를 치유해 계명을 어기는지 눈여겨보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시는 대로 행하신다. 하느님은 계명의 준수보다는 사람을 더 중히 여기신다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가치는 느끼지 못한 채, 자기들이 공동 가치로 정한 규칙 뒤로 숨는 바리사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분노하며 바라보신다. 바리사이들의 경직된 미음에 분노로 투쟁하신다. 그분은 그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한 채, 당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행하신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품에 초대해 이해하시고 그 경직된 자세와 결핍된 삶에 연민을 느끼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치에 대해 확신을 지니고 계시다. 그분은 자신이 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신다. 모두가 반대한다 해도 예수님은 그것을 무릅쓰고 실행하신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쓸 필요를 느끼지 않으신다. 그분은 하느님이 원하신다고 여기는 것, 즉 인간에게 올바르고 유익한 일을 행할 뿐이다.
안셀름 그륀
2015_12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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