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전
-유치환-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
수염을 드리운 몇 그루 옥수수에 가지, 고추, 오이, 토란, 그리고 울
타리엔 덤불을 이룬 넌출 사이로 반질반질 윤기 도는 크고 작은 박
이며 호박들!
이 지극히 범속한 것들은 제각기 타고난 바탕과 생김새로 주어서
아낌없고 받아서 아쉼 없는 황금의 햇빛 속에 일심으로 자라고 영글
기에 숨소리도 들릴세라 적적히 여념 없나니
과분하지 말라 의혹하지 말라 주어진 대로를 정성껏 충만시킴으
로써 스스로를 족할 줄을 알라 오직 여기에 목숨의 유열과 천지와의
화합에 있거니
한여름 채전으로 가 보아라
나비가 심방 오고 풍뎅이가 찾아오고 잠자리가 왔다 가고 바람결
에 스쳐 가고 그늘이 지나가고 비가 내리고 햇볕이 다시 나고 …… 이
같이 많은 손님들의 극진한 축복과 은혜 속에
이 지극히 범속한 것들의 지극히 충족한 빛나는 생명의 양상을 한
여름 채전으로 와서 보아라
*채전: 채소밭
*넌출: 길게 뻗어 나간 식물의 줄기
*범속한: 평범하고 속된
*일심으로: 한마음으로
*유열: 유쾌하고 기쁨
*심방: 방문하여 찾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