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신부: 가난한 아들들의 친구, 톤즈의 돈보스코 성인
안정효 전 이사장/안정효내과 원장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이태석 신부이다. 그는 1962년 부산 송도의 가난한 동네에서 10남매의 아홉째로 태어나, 홀어머니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8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다. 평범한 대학시절은 신설 학교의 열악한 캠퍼스에서도 음악과 농구에 열심히 하며 학업에만 몰두하지 않던 동창으로 기억된다.
인턴 때에는 신경외과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못해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전방과 후방 근무 때에, 어릴 때 소망했으나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드신 어머니 때문에 감히 드러내지 못했던 길을 결심하게 된다. 천주교 사제의 길이었다. 그 나이에는 교구사제가 되기보다는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는 길을 택하였다. 1991년 제대 직후에 그는 의사라는 재주를 가진 터라 의료봉사 수도회에서 체험하였지만, 그 수도회에 들어가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우연히 가까이에 있는 청소년을 위한 교육 수도회에서 아이들과 농구를 하고 땀을 흘린 후에 아이들과 함께 살겠다고 바로 결정하게 된다.
1991년 8월 천주교 살레시오회라는 수도회에 입회하여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미션을 가지게 된다. 1992년 수도자로서 광주신학교에 입학하고, 1998년에는 로마 살레시오대학에 유학하고 2001년 6월에 서울에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사제 서품을 받는다. 10년 동안의 수련과 사제가 되기 위한 수학을 한 후 신부가 되었으며, 로마 유학 시절 여름방학 동안에 아프리카 케냐와 수단에서의 선교 체험 후에 수단의 톤즈에 가서 살기로 일찌감치 결심하게 된다.
서품 후 2001년 12월에 수단 톤즈로 떠난다. 수도회 소속을 수단으로 옮기면서 평생을 그곳에서 살 계획으로 간 것이다. 이 신부는 수도회에 입회할 때에 의사 면허증을 찢었다고 한다. 즉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톤즈에서의 삶은 의술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 손 놓았던 환자 돌보기를 다시 시작한다. 물론 톤즈에서의 주요 생활은 학생들 교육과 천주교 사제로서 미사와 사목 활동이었다. 그러나 작은 진료실에서 시작한 환자진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기존 있던 움막 진료실에서 진료를 시작한 이 신부는 손수 시멘트 병원 건물을 지었다.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이 신부는 접하지 않던 악기들을 다루는 법까지도 독학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남수단에서 하나뿐인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여러 행사에 초청받아 연주하기도 한다.
다음은 초창기의 보내온 이메일이다. 당시의 심정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옮겨본다.
2001년 12월 5일 케냐에서
‘12월 6일에 드디어 수단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엄청난 환자들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 많은 기도 부탁한다. 난 이곳에서 내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과 성탄을 맞을 수 있게 되어 성탄의 신비를 조금 다른 차원에서 깊이 묵상할 수 있을 것 같다.’
2002년 1월 13일 톤즈에서
‘…창고라고 하기보다 더 지저분한 진료실, 최악의 열악한 환경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지저분한 환자들, 먼지로 가득 찬 소독되지 않은 기구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 없는 상황들, 이 모든 것들을 예상은 했지만 직접 코앞에 닥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더구나. …하지만 얼음은 녹기 마련인 모양이다. 자연유산으로 하혈하던 아주머니가 혈압이 조금씩 좋아져서 퇴원을 하는데 남편이 찾아와 죽는 줄 알았는데 살려줘서 고맙다며 날씬한 아프리카 토종닭 한 마리를 놓고 가고, 수족 관절의 고름 때문에 걷지 못하던 청년이 좋아져 제 발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며, 복부 결핵으로 배 불뚝이었던 아이가 날씬해져 가고 있는 등의 조그마한 결실들이 얼었던 나의 마음을 조금씩 녹여가고 있구나. …크나큰 욕심은 버리기로 했다. 단지 나는 세상의 남는 것의 1%를 없는 세상으로 연결하는 작은 다리 정도만 되어 보기로 했다. 그리스도교적인 형제적인 사랑을 연결해주는 작은 고리 정도만 되어 보기로 했다.’
2002년 3월 31일 톤즈에서
‘…지난주에는 진료와 약을 공급하기 위해 약 200여 명의 나환우들이 있는 60 km 정도 떨어진 한 마을을 다녀왔다. 한 달 치의 약을 주면서 한 말 정도의 곡식과 약간의 식용유도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나환자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한 어머니가 4살 남짓한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왔길래 검진을 해 보니 나병이 아니더구나. 그래서 어머니에게 그 아이가 나환자가 아니라고 축하를 해주었다. 하지만 기쁨 대신에 실망으로 가득 찬 아이와 어머니의 눈을 보면서 가난의 끔찍함을 몸서리치게 느낄 수 있었다. 받을 곡식을 위해 미리 준비해온 때 낀 비닐 포대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는 모녀의 뒷모습을 보기가 너무 안쓰러워 살짝 불러 곡식과 기름을 주어 보냈다.’
처음 톤즈에서의 열악한 상황을 적어 보낸 이 이메일들을 지금도 가끔 읽으면서 톤즈 생활 초기에 이 신부가 겪은 막막함과 절실함을 느끼며,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사제로서 항상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그냥 의사로서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의술은 한 부분이었지 전업이 의료인인 우리와는 달랐다.
이태석 신부에게서 환자진료는 그 삶의 한 부분이라 의사로서의 이태석으로는 그를 다 표현할 수는 없겠으나, 의사인 우리는 그의 의사로서의 면만을 보아도 참 많은 것을 일러준다. 10년간의 수도자로서의 수련과 수학을 마치고 8년간의 톤즈 생활을 보내고 휴가차 귀국하여 발견된 대장암 투병 후에 선종할 때까지 마음속에는 톤즈의 아이들과 환자들 생각뿐이었다.
2003년 3월에 대한의사협회의 언론사 방영 계획을 접하고 보낸 편지에서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풍족하게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그곳의 많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은 현실화되었다. 2003년 12월에 KBS의 ‘한민족리포터’에 방영된 이 신부의 톤즈 생활을 접하면서 많은 사람의 후원이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의학을 공부한 꽤 많은 후배들이 이 신부의 모습을 보고 졸업 후에 의료봉사를 하고 있고, 또 이 신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후배도 있다. 한 사람의 삶이 많은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배 의사들에게 그리고 마음이 차갑던 사람에게 이웃사랑을 생각하게 하고 또 행동하게 하고 있다(이태석 신부의 후원단체인 수단어린이장학회에 지금도 매월 4–5천 명이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위 글은 수단어린이장학회 안정효 전 이사장님의 글 입니다. (대한의사협회 협회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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