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자랑스런 의사상 역대 수상자 그후 ②
고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늘도 묵묵히 진료현장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희귀난치병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실과 실험실에서 밤을 밝히는 의사들, 지구촌 오지에서 헐벗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그들이 있기에 행복한 미래를 향해 비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한미자랑스런의사상’은 이같은 소명을 받드는 이 땅의 자랑스런 의사들을 격려하고, 대외적으로 의료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2008년 대한의사협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 의협과 한미약품㈜이 공동으로 제정했다.
의협신문은 한미자랑스런의사상 역대 수상자들이 걸어간 길을 재조명하고, 그들이 펼치고자 했던 인류애가 오늘 이 시각 어떤 모습으로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의사와 의료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가치를 되새겨보기 위한 특별시리즈를 마련했다.
2009년 12월 17일 제2회 ‘한미자랑스런의사상’ 시상식이 열린 서울 JW메리어트호텔. 사제복장을 한 가톨릭 신부가 들어섰다. 말기암 투병 중인 그는 오랜 시간을 서 있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좋은 상태였지만 겉으로 표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수상을 축하한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환한 웃음으로 화합하기도 했다.
이태석 신부는 차분한 목소리로 “높은 기술로 불치의 환자를 고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백신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을 주시니 부끄럽다”며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태석 신부(1962∼2010)의 선종 소식이 들려온 것은 한미자랑스런의사상 시상식이 열린 뒤 한 달이 채 안된 2010년 1월 14일.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다.
이 신부의 선종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아직 할 일이 많은 분인데 너무나 안타깝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미자랑스런의사상 수상 한 달 후 선종
1987년 인제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그는 여느 동기생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의사의 길을 걸었다. 10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의대에 진학한 그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도 컸다.
하지만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동안 그는 거역할 수 없는 이끌림에 눈을 떳다. 가톨릭 사제의 길이 보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께서 혼자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였습니다. 4남 6녀 가운데 한 명은 신부이고, 한 명이 수녀였는데 저마저 신부가 되겠다고 하자 어머니가 많이 서운해 하셨죠. ”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은 그는 1991년 군 복무를 마친 후 한국천주교살레시오회에 입회, 뒤늦게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신부가 되기 위한 길은 험난했지만 그의 마음은 평안했다. 1999년 로마 살레시오 신학대학에서 가톨릭 사제의 길을 걷던 이 신부는 운명적으로 아프리카 수단과 만난다.
“1999년 여름방학 때 봉사를 하기 위해 아프리카 케냐에 간 적이 있습니다. ”
여기에서 이 신부는 2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내전으로 수백 만 명이 죽어갔다는 남수단의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 특히 톤즈지역은 파종할 씨앗마저 식량으로 써 버린 탓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한다고 했다.
“제가 갈 곳이 거기구나 생각했지요.”
200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이 신부는 자원봉사자들 조차도 꺼려한다는 남부수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사람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잊고 살 정도로 황폐화돼 있었다.
이 신부는 먼저 당장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진흙과 대나무로 움막 진료소를 만들었다. 톤즈에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자들이 몰려들었다.
맨손으로 벽돌을 찍어 병실을 만드는 이 신부의 모습은 2003년 KBS한민족리포트를 통해 보도되면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수단 이태석 신부님’이라는 후원카페가 결성됐다.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시멘트로 만든 병원을 짓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이곳에서 이 신부는 하루에 보통 200∼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인근 80여개 마을을 돌며 순회진료와 예방접종에 나섰다. 방치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수백여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이 신부는 무지와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버리기 위한 청소년교육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이곳 아이들은 악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가르쳐 주면 일주일만에 혼자 연주를 할 정도로 놀랄만한 재능을 갖고 있답니다.”
청소년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이 신부를 위해 다음 카페를 중심으로 2007년 외교통상부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이재현·환경부 기후대기정책관)가 결성됐다. 개미같은 회원들의 정성과 가톨릭 성직자·신자를 비롯해 살레시오수도회의 따뜻한 손길은 돈보스코 초중고를 운영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돈보스코학교는 남부수단에서 가장 가고싶은 학교로 성장했다. 이 신부의 몸소 실천하는 사랑을 지켜본 아이들 사이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고맙습니다”, “사랑해요”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이 신부의 지칠줄 모르는 강행군이 계속되는 동안 정신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던 수단 톤즈마을에는 기적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2008년 모처럼 휴가를 얻어 귀국한 길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이 신부는 청천벽력같은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곧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리라던 이 신부의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지칠줄 모르는 봉사…톤즈마을엔 기적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향했던 고인의 삶이 알려지면서 후원 카페와 수단어린이장학회를 찾는 후원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불과 수십명으로 출발한 카페회원은 미주지역 후원회까지 결성되면서 10월 현재 9817명으로 늘어났으며, 정기적인 장학금 후원회원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도 톤즈마을 무료진료소와 학교에 의약품·학습 기자재·학용품 등을 지원키로 약속했으며, 그의 모교인 인제대는 고인의 숭고한 뜻을 잇기 위한 추모전을 연데 이어 톤즈 출신의 유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해 공부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는 성경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했던 고인의 불꽃같은 삶은 2010년 4월 11일 KBS 스페셜 ‘수단의 슈바이처 故이태석 신부-울지마, 톤즈’편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소개됐다.
▲ 2006년 10월 31일 의협 동아홀에서 열린 ‘수단어린이돕기 작은음악회’에 참석한 이태석 신부와 다음카페 후원 회원들.
프로그램과 영화를 감독한 구수환 PD는 “이 신부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다”고 했다. 중견화가인 강현주 화백은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이태석 신부님 추모 그림전’을 열고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내놨다.
그동안 끊어졌던 의료봉사도 다시 이어졌다. 올해 군의관으로 전역한 정준원 회원이 올해 8월 닫혔던 진료소 문을 연 것. 2011년 4월부터는 부부 의사가 1∼2년 예정으로 의료봉사를 맡을 예정이다.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자원봉사자를 현지에 파견, 중단된 고교 건물 건축을 재개하고, 연주를 멈춘 브라스밴드를 재창단할 계획이다. 이 신부의 선종 1주기를 맞는 내년 1월에는 추모 음악회와 음반도 만들기로 했다.
이 신부가 몸소 보여준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들 마음 속에 묻어나면서 더 진한 향기로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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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