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어린이 장학회 ‘내가 가진 1%가’ & 이태석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내가 가진 1%가 어떤 이들에게는
100%일 수 있습니다.
1원이면 사탕 하나로 한 끼 먹는
아이들에게 부족한 당분을 줍니다.
10원이면 연필 하나로
때 낀 손에서 글씨가 시작됩니다.
100원이면 비타민 하나로
아이들의 원기를 찾아줍니다.
1000원이면 항생제 한 알로
아픈 아이의 위급한 생명을 구합니다.
2000원이면 피리 하나로
전쟁에 시달린 아이의 마음을 달래줍니다.
매월 5000원이면 한 아이의 교육이 가능하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미래의 꿈을 심어주게 됩니다.
– 수단 어린이 장학회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본 후 이태석 신부가 살다간 궤적을 좇기 위해 간호대에 진학한 제자가 있다. 이렇듯 때로 한 사람의 일생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어디 제자만 이런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본 후 나의 삶도 여러모로 달라졌다. 우선 소식(小食)하게 된 일. 그리고 퇴근 후 피곤을 빌미로 핸드폰 유튜브를 보다 잠을 청하던 습관을 버린 일. 인생에는 그보다 훨씬 소중한 일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발명은 인간의 활동반경을 넓힌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사람들의 삶을 더욱 바쁘게 만든다. 현미경의 발명은 시각이 포착하지 못하는 미세함을 낚아서, 생명체의 유지와 존속에 기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건강염려증에 따르는 과도한 조바심을 갖게 했다. 인간이 발명한 사물과 발견한 법칙들에근 이렇듯 언제나 대극의 요소가 있다. 빛나는 별을 품은 것이 우주의 검은 배경이듯, 세계가 물질과 반물질로 이루어지듯. 그러나 제 마음과 행을 일치시켜 온전히 살아낸 한 인간의 역사는 사물과는 달리 그의 죽음과 더불어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지만, 인류공동체의 지성과 지혜의 상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내게는 이태석 신부가 그랬다. 의대 졸업 후 ‘내가 있어야할 곳이 어디인가’를 집요하게 스스로에게 묻던 청년은, 남수단의 나병환자들에게 가기 위해 신부 서품을 받고 아프리카를 지원했다.
남수단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 톤즈, 발가락과 손가락이 짓무르다 떨어져나가고 신경이 마비되어 걷기 힘든 상황에 놓여도 내가 왜 아픈지. 왜 이런지조차 알지 못하고 한 그루 고목처럼 뻣뻣하게 굳어가던 사람들. 그런데 이태석은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봤노라.” 고백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운명에 삿대질하지 않는 딩카족 사람들. 그들의 검은 눈동자에는 고통과 기쁨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고스란히 살아낸 자의 맑음이 있었다. 정부군과 반군 둘 다에게 얼마 남지 않은 가축과 곡식·인명을 유린당하고, 극심한 물 부족과 기아로 질병에 노출된 몸을 끌면서도 이태석의 손을 잡으며 그들은 웃었다. 발가락이 떨어져나간 채 맨발로 다니다 넘어지고 벌어지는 상처를 막기 위해 이태석 신부가 각각의 발에 맞춘 샌들을 신겨줄 때, 몇몇은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 행복은, 인간이 발견하려고만 들면 지금 이 순간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어쩌면 ‘신성’이란 재물을 만들어내는 거창한 능력도,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날게 하는 최첨단의 재능도 아님을 그들의 들썩이는 어깨와 가벼운 손놀림이 깨닫게 했다. ‘신성’은, 가장 참혹한 고통의 현장-인간이 그렇다고 믿는-에서 한 가닥 희망과 평온을 찾아내는, 혹은 오고가는 변화와는 관계없이 고요한 기쁨을 유지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이렇듯 울지 않는 불문율을 가진 딩카족 여인과 남지들이 울었다. 3년 만에 잠깐의 휴가를 얻어 한국으로 떠난 이태석 신부가 돌아오지 않자 보고픈 연인을 생각하듯 신부를 그리워하던 그들이, 한국인 신부가 찍어온 태석의 영면식 장면을 보고 하염없이 울었다. 이태석 신부를 “쫄리”라고 부르던 여인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은 그 대신, 하느님이 자신을 데려가셔야 했다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투병 14개월만이었다.
“하느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마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거야.”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구하지 않고,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물었던 사람. 그 덕분에 딩카족 소년과 소녀들은 수학과 언어를 익히며 자립의 기회를 얻었고 밴드 합주를 하며 웃음을 되찾았다. 치료자이자 스승이었던 사람을 아이들은 ‘아버지’로 따랐다. 이태석이 전쟁으로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해 조직한 브라스 밴드에서 트럼펫을 불던 소년은 태석의 죽음 이후 후원회의 도움으로 태석의 모교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토마스 타반 알콧은 궁금하다. “한국에서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지위나 대접을 알고 신부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왜 이렇게 좋은 삶을 포기하고 신부가 되고 남수단 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 건지 저는 지금도 궁금해요. 나중에 직접 여쭤보고 싶어요. 그리고 신부님이 살아 계셨다면 말해주셨을 겁니다. ‘잘 했어, 수고했어.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해.’” 이태석이 가장 자주 마음에 새기던 말 그리고 함박웃음을 통해 모두에게 전한 언어는 ‘Everything is good!’이었다.
후원의 그림자
달에 한 번, 후원하고 있는 단체에서 메일이 온다. 아프리카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판 일들, 태풍으로 검박한 보금자리에서 내쫓긴 난민들의 수혜복구…. 대한민국의 안온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지구 반대편의 일상적 재난을 목도하며, 오늘의 나의 안전이 결코 나 스스로 만든 결과가 아님을 깨닫는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듯, 그들도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싶어 그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필리핀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갔을 때 멈춤 대기 중이던 차안에서 다리 아래 아이를 업은 눈 큰 젊은 여인을 보았다. “왜 저기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운전하던 지인이 말했다.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저곳이 집이야.” 방울꽃인가. 시들어가는 들꽃 작은 묶음을 들고 멈춰선 자동차마다 창문을 향해 내밀던 소녀들. 그런데 그런 소녀들을 도와주지 말란다. 문맹인 부모의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에 가야 한다. 아이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벌어들이는 일당이 부모의 벌이를 능가하기에 거리로 나오는 아이들.
어떤 지원이나 원조는 유익이 아니라 해(害)라는 것을 그날 절실히 느꼈다. 어떤 사랑과 도움은 독립과 주체 아닌 의존성과 취약성을 기르고 만다는 것을 필리핀이 아니라도 가정이나 학교에서 왕왕 목격하지 않았던가. 도움이란 함께 하는 것, 내적인 힘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 가능성을 믿는 것. 원조라는 이름으로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 들이는 공장들은 일자리 제공이 아닌 값싼 노동력 착취인 경우가 잦고, 내가 마시는 커피의 원산지인 브라질과 케냐의 농부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0.5% 대부분의 수익이 다국적 기업인 가공업자와 중간 무역업자에게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포스트 모던한 은폐 속에서, 올바른 공감과 지원의 의미를 이태석은 돌아보게 한다.
박혜진 문예비평가
관련 링크: [시, 소설을 만나다]울지 마, 톤즈가 바꾼 것 < 함께하는 교육 < 요일특집 < 기사본문 – 광주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