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rosity의 사전적 의미는 관대함, 너그러움, 아낌없는 마음씨, 아낌없이 줌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제 기도와 묵상 주제어입니다.
지난 해 코로나19가 필리핀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모든 학교가 임시휴교를 하고, 생필품판매를 제외한 모든 사업장에 대해 잠정적인 폐쇄와 제한적 운영을 하도록 필리핀 정부가 강제함에 따라 많은 근로자들이 실직을 했고, 급여의 일부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웃들의 두려움과 걱정은 커져만 가는데, 우리가 줄 수 있는 위로와 희망은 너무나 미미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상황이 나아지기보다는 감당해야 할 힘든 날들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은 두려움과 염려 때문 여기저기서 쏟아내는 날 선 비난과 불만들로 가득한 한국의 뉴스를 들을 때마다, 비록 고통과 힘듦의 크기가 다를지라도 각자가 느끼는 고통과 힘듦의 정도는 절대 비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고통의 기억이 이미 희미해진 한국 사람들에게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이무스교구를 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라면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상황에서도 어떤 두려움이나 염려는 찾아볼 수 없고, 오늘도 어제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향한 씩씩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폴란드 출신 수녀님께서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저희 선교센터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다른 저의 마음의 무거움과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졌는지,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신부님, 신부님은 좀 더 관대하게 일하셔야 해요.”
순간, “아니 이게 뭔소리여..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지난날의 모자람을 기억하며 오늘의 최선에 더하겠다는 마음으로 게으름 피우지 않았으며 열심히 하였고,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아도 늘 모자랄 수밖에 없는 살림살이를 챙기다 보면 아쉬운 것들에 대해 잔소리를 하게 되고, 조금만 생각하고 살피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일러주고, 또 일러주어도, 나아질 것 같지 않는 직원들과 선교센터가족들의 무한반복 실수와 무원칙에 대해 가끔씩(?) 큰소리로 꾸짖고, 화내고, 성질부림을 했기로서니 ..더 관대해지라고?”
마음 속 불편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저녁 묵상을 준비하면서 필리핀 선교 사목을 하며 서로가 신뢰할 수 있고, 마음과 뜻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친구이며 동반자라 여기며 어렵고 힘들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힘이 되어 주었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또한 저에게 주신 주님의 선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주간쯤 지났을 때,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에 조금씩 여유가 찾아들더니, 전혀 다른 저의 응답과 함께 조금씩 마음의 평온함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끔 잠자리에 들려고 하면 하루 동안 실수한 것이 생각나 잠을 못 이룰 때가 있습니다. 옆에 아무도 없는 데 얼굴이 빨개지고 그때가 생각나 ‘아이 참 왜 그랬지’하며 혼잣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사로잡히다보면 스스로가 너무나 안타깝고 초라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웃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과거의 실수나 잘못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둠과 답답함의 무게는 커져갑니다. 결국 마음 깊숙이 가라앉은 걸러지지 않는 탁한 침전물처럼 마음 속 한자리를 굳게 차지하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마땅한 은혜를 관대함과 함께 주십니다.
열심히 노력하며 기대했던 일이 막혔을 때의 실망과 좌절 경험해 보셨지요? 살다보면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 먹은 대로 일들이 되지 않을 때마다 막힘이 곧 실패라 여기며 의기소침해하시지는 않는지요? 막힘은 은혜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길이 있어 가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절벽이고, 해가 되는 길이란 걸 나는 모르나 주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로 들어설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막힘을 은혜로 주십니다.
‘왜 내 길은 이렇게 막히는 걸까’하고 탄식하기보다 ‘오늘도 주님이 이렇게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구나.’라고 막힘을 통해 주님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게 되지요. 지나놓고 보면 그때 가려던 길을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 볼 수 없었고, 보이지 않았던 그 길의 끝이 이제야 보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왔던 멀리 있는 길이 바른길이고 복이 되는 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부르는 이들에게 막힘이란 실패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라 고백 됩니다. 막힘도 은혜가 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수단어린이장학회 후원회원 가족분들과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기도와 나눔이 있어 로렌조하우스는 맡겨진 아이들을 잘 지키고 돌볼 수 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부쩍 자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몫인지 늘 감사하게 됩니다. 정말 남는 장사입니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하게 될 아이를 보면, 뿌듯해집니다.
지난 4년 동안 수단어린이장학회로부터 장학지원을 받은 수혜자 중 공립중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로렌조하우스 아이들을 가르치는 졸업생,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 후 발령을 기다리는 졸업생,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사회복지사 취업을 약속받고 준비하고 있는 졸업생. 이렇게 여러분의 기도와 나눔으로 가꾸고 돌보았던 작은 나무들이 얼마나 예쁘게 잘 자라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졸업생들이 교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경찰도 되고, 사회복지사도 되고, 회계사도 되고, 범죄수사를 위한 CSI도 되고,
지금처럼 모두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우리의 어려움을 드러내며 도움과 나눔을 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생각하며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염치 불구하고 청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깊은 감사드리며, 주님 안에서 늘 평안하시기를 기도하며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억합니다.
축복합니다.
정형준 바오로 신부 / 춘천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