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단어린이장학회 뉴스레터 제99호(2022년 5월호)에 실린 인사말입니다.
기도와 선한 바람이 필요한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살레시오회에서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보호공간을 마련하고 있으며 도움을 요청한다는 선교국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수단에서 경험했던 전쟁의 아픔이 다시금 우리 곁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톤즈병원에서 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밤에 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2007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이태석 신부님이 계신 톤즈공동체에서 봉사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직을 서던 싼티노는 찾아온 사람이 환자는 아니지만 제가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쫄리, 파더 쫄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찾아오면 신부님께서는 진료실 안으로 불러 술주정을 들어주고 보내셨기 때문에 출타 중인 신부님을 대신해 제게 연락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신부님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 나온 아홉 살 군인 ‘마뉴알’이었습니다. 내막을 알 턱 없는 저는 이 무례한 녀석에게 다음날 낮에 다시 찾아오라고 철문 사이로 전하고 돌려보냈습니다.
마뉴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나고 난 후였습니다. 신부님께서 병환 중에 출판을 준비하며 제가 찍은 사진 속 마뉴알의 눈빛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총에 맞아 크게 다쳤던 마뉴알은 두 달 간 병원치료 끝에 좋아졌지만 그 후로도 신부님을 찾아오곤 하였고, 신부님께서는 마뉴알의 눈빛에 남은 마음의 상처를 함께하며 끊임없이 기도한다고 책에 이야기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남수단에 계신 사이젠신부님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이 왔습니다. 오래된 사진 폴더에서 제게 전해주지 못한 옛날 사진이었고, 거기에는 마뉴알의 앳된 모습이 있었습니다. 2007년 12월 24일 성탄전야에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15년 전 사진 속 신학생이었던 사이젠신부님은 현재 남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처럼 아이들을 만나며 지내시고, 당직 서던 싼티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남수단에서 도로를 건설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뉴알은요? 마뉴알은 아직 사진 속 앳된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신부님께서 선종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마뉴알이 톤즈에서 군인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며, 그 속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이들은 마뉴알과 같은 아이들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마뉴알들이 있다는 것은 참 마음 아픈 일입니다. 마뉴알을 만나고 난 후 매일 전쟁 종식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신부님 책에 실린 내용을 다시 읽으며 많은 이들의 기도와 선한 바람이 필요한 때는 언제나 지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은 곳에서 신부님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시는 장학회 후원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09년 5월의 어느 날 마뉴알 이야기를 하시던 신부님을 기억하며, 신부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고 얼마 후 마뉴알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잠시 상상해 봅니다. ‘야~ 니~ 와 벌써 왔노?’ 하시며 여전히 그의 주정을 받아주고 계시겠지요?
신경숙 가정의학과 전문의 /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