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졸업을 한두 달 앞둔 2020년 3월 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필리핀의 모든 학교가 몇 주간 휴교에 들어갔습니다. 휴교를 얼마나 한다고, 몇 주 정도 지나면 마지막 학기 시험을 치르고 방학도 하고 졸업식까지 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도 잠시였습니다. 바이러스의 빠른 확산세로 인해 졸업은커녕 필리핀 전체에 완전 봉쇄령이 내려졌습니다.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집에서 자유로이 나올 수 없었으며 이른 저녁부터 통행금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하는 가족들은 ‘묘지’나 ‘무허가 지역’ 등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쓰레기를 주워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분리하여 고물상에 팔아 가족들의 하루 한 끼 식사를 해결해 가는 아주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게 흘러갑니다. 부모와 아이들은 좀 더 쓸 만하고 돈이 될 만한 쓰레기를 줍기 위해서 대형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의 영업 종료 시각에 맞춰 집을 나서고, 금방이라도 바퀴가 터져버릴 것 같은 낡은 리어카에 밤새 주운 쓰레기를 높직이 쌓아 올리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유난히 기분이 좋고 들떠 있는 날은 아버지가 쓰레기를 많이 싣고 와서 천막 앞에 수북이 쌓아 놓은 날입니다. 그리고 간혹 아이들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나 간식거리를 손에 들고 와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며 큰 인심을 보입니다. 꼬질꼬질한 고사리같은 손으로 내민 작은 과자를 받아먹으면 아이들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곤 합니다.
팬데믹으로 생긴 통행금지 시간은 이들의 생계를 끊어놓았습니다. 우리가 쌀과 먹을거리를 들고 방문할 때면 그들은 이렇게 한숨 섞인 하소연을 했습니다. ‘코로나로 죽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것 같다’라는 마음 아픈 말을요. 이런 어려운 사정들을 전해들은 한국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의 손길을 주었으며, 작년(2021년)에는 수단어린이장학회로부터 후원을 받아 3월부터 12월까지 쌀과 식료품들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공립학교는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입니다. 그런데도 빈곤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자녀들도 생계를 위해 부모를 도와 쓰레기를 주워야 하고, 쓰레기를 주울 때는 글과 셈을 하지 못해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꾸준히 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이니, 가난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자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시켜 주기 위해 그들과의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우선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했습니다. 아이들 대부분은 출생증명서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출생증명서를 만들어 주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을 시켰고, 이미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는 장학단체를 연결해주어 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반응만 보인 부모들이, 이제는 자녀를 공부시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스스로 도움을 청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더 있었습니다. 이제 일상이 된 온라인 수업(비대면 수업)은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에게서 배움의 기회를 앗아 갔습니다. 형제 중 한두 명이 온라인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나머지 형제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공부하는 형제를 돕기 위해 어린 나이에 일선에 나서야 했습니다.
저희는 온라인 수업에 필요한 기기 마련이 제일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작년(2021년)에 수단어린이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후원받아 등록금, 핸드폰과 태블릿, 인터넷 설치와 학업에 필요한 용품들을 지원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지원받은 아이 중 안젤로와 단 로즈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안젤로와 단 로즈는 유치원을 졸업하고는 팬데믹으로 인해 1년을 넘게 학교를 쉬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을 1학년에 입학시키기 위해 학교를 쉬는 동안 잊어버렸을 알파벳과 산수 공부 등을 가르쳤다. 함께 공부할 때면 아이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고, 수녀님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아이들처럼 저 또한 아이들과의 시간이 기다려졌습니다. 지원받은 태블릿으로 공부를 할 때면 안젤로의 형제들도 모여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동생 크리스티안은 태블릿으로 공부하여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보여준 적극적이고 열심히 하는 모습에 많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내심 ‘안 그래도 힘든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얼마 정도 공부하다가 그만두겠지’ 하며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인제야 고백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아이들을 만나서, 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안젤로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곧 2학년에 올라간다고 자랑을 늘어놓곤 합니다. 안타깝게도 단 로즈의 가족은 살고 있던 무허가 지역이 완전히 철거되면서 거리를 옮겨 다니며 지내고 있는 상황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단 로즈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고민하며 찾고 있습니다.
또한 수단어린이장학회로부터 후원을 받았던 학생 중 2명의 대학생이 올 6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모든 학교가 대면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면서, 더 많은 아이가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렇듯 제가 필리핀에서 만나고 함께 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어느 날엔가 밭에 숨겨진 보물이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 제 마음은 온통 그들로 가득합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빈곤한 삶의 무게로 마디마디가 흉하게 일그러지고 때가 끼어 진주임을 알아볼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들의 삶의 자리인 ‘묘지’, ‘무허가 지역’, ‘도로 아래’, ‘길 위’……. 그러나 오늘도 보물이 묻혀 있는 밭으로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볍고 기쁨에 넘쳐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되돌아봅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수단어린이장학회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이봉숙 필로메나 수녀 / 성가소비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