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6일, 굼보에서 치프리아나 수녀님이 감동적인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내용이 너무 아름다워 전문 그대로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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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들께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면서 1년 동안 과연 내가 모시고 산 왕은 누구였을까 묵상해 봤습니다. 하루 한 순간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제 삶 속에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리는 땀과 범벅이 되어 항상 함께 했던 이 아프리카 남수단의 가난한 사람들이 알고 보니 저의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이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밥을 해 주면서, 종종 걸음으로 아침부터 저녁때 까지 이들의 삶이 더욱 나아지기를 기도하며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주민들에게 거저 주면 안 된다는 원칙을 뒤로 한 채, 2년 동안 줄기차게, 체중 미달 아가에게 분유 배달을 했고, 성당 빈첸시오 회원들과 함께 70여분 정도 정말 어려운 이들을 위해 한 달에 한번 생필품 전달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은 우리의 왕이신 할머니께서 바위 위에서 아무의 도움 없이 사신다는 전갈과 또 다른 할머니는 집 없이 나무 밑에서 네발로 기어 다니며 사신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집을 지어 드리는 일을 동네분과 함께 했습니다. 대나무로 엮은 벽에 맨손으로 흙 바르는 일을 하면서 그래도 이 집이 이 분들에게는 이 집이 대궐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차를 타고 지나가며 이 흙벽집을 바라보면 흐뭇합니다. 우리의 왕들을 위해 마을에 우물 파는 일을 하면서 이들 보다 우리가 정말 더 기뻤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왕께서 이제 더 이상 물 마시기 위해 흙탕물을 가라 앉히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왕들을 집으로 모셔 왔습니다. 몇 개월간의 임시 진료소 사용 후 지금은 새로 지은 아담한 진료소에서 여기 저기 아파서 찾아오는 이들을 보살핍니다. 제대로 갖춰진 시설이 아니어서 죄송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말라리아 고열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다 낫고 나면 감사 인사를 합니다.
이제 진짜 우리 꼬마 왕들의 이야기를 할까요.
임시 진료소로 사용하던 작은 집에서 어린이 집을 열었습니다. 9시에 시작인데 해시계가 잘못 되었는지 이른 아침 8시 전부터 와서 줄줄이 화단 앞에 제비 새끼들처럼 앉아서 수녀님이 오라고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녀님은 열심히 어젯밤 바람이 놀다 어질러 놓은 자리를 청소 한 후 우리 꼬마 왕들을 오게 하는데, 들어 오자마자 마마를 찾으면서 울고 불고 집에 간다고 난리입니다. 왜 그런가 보니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래서 빵 반 개 씩 나눠 주니 이젠 자리가 잡혔지요.
비록 모기들이 진치고 있지만 옥외 바까나(화장실)도 있는 우리 어린이 집. 그러나 화장실 사용법을 알려 줘도 습관이 안 된 탓에 그냥 들판에서 일을 보는 우리 꼬마 왕들!, 열심히 우유도 주고, 계란도 삶아주고, 튀김도 해 주는데 여전히 체중 미달이어서 우리 수녀님들은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우리 꼬마 왕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지금은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가진 재물도 없고, 저희들에게 커피 한 잔 같이 하지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김치 한 폭 가져다 주는 분들도 없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여러분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루를 마감 하고 성체 앞에 앉으면 하루 전쟁이 끝난 기분으로 편안하게 주님과 대화합니다. 오늘은 정말 더웠노라고, 그래도 옥수수 가루와 설탕을 받아 들고 가는 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겠지요, 하면서 뿌듯함의 하루를 주님과 나눕니다. 그리고 고국에서 우리 가난한 선교지 주민들을 위해 십시 일반 모금을 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한 분 한 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건강과 평화를 주시라고 기도 합니다. 저희를 도와 주시는 모든 분들을 생각하면 제가 더 열심히 기도하며 일해야겠다는 각오가 됩니다.
여러분들의 정성과 사랑은 선교지 주민들뿐 아니고 저희 선교사들을 살리는 큰 몫을 하고 계심을 말씀 드리며 감사 인사 드립니다.
신앙의 해를 마감하면서 이곳 남수단 제가 살고 있는 굼보 마을 성당에도 오후 3시부터 밤 9시까지 강의와 고백성사 미사 그리고 성시간을 했습니다.
물질이 만연하여 신앙이 식어 가는 것을 염려하셨던 베네딕도 교황님의 배려이셨지요. 세상은 물질이 넘쳐 나도 지구 한 켠의 형제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하루 하루를 고달프게 지내고 있음을 현장에서 알려 드립니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이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은 성장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님,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하는 이들이 진정한 우리의 작은 왕이시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힘을 얻고 있음을 발견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류치프리아나 수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