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에서 굴이 왔단다.
우리 어머니 고향에 남아 살면서 바다로, 밭으로 정신없이 일하느라
손은 갈퀴요 뼈는 휘어 허리가 아프다는 조카 따님이 굴을 해서 보내셨단다.
이 추운 겨울에 배 타고 30분 나가서 맑고 푸른 바다에서 해 온 굴.
쌓아 뒀다가 하나 하나 깨서 꺼낸 뭐라고 말 할 수 없이 향긋한 맛을 내는 싱싱한 굴.
짭짤한 바다 내음이 그대로인 굴.
정수기 물에 살짝 한번 씻어서 그대로 먹어도 좋고,
초 고추장이나 초간장 혹은 레몬 즙을 짜 넣어 먹어도 맛이고 영양이고 그만인 굴.
일년중 가장 추운 이 무렵에 맛을 보는 그 굴이 왔단다.
보내신 분의 나이는 이미 60을 넘어 한참 전에 손주를 보신 관록 붙은 할머니라
조카 따님, 이라는 표현이 좀 간지럽지만 잘못된 호칭은 아니니까…
그 칭호를 가능하게 만든 우리 어머님이 80 훌쩍 넘은 나이.
나이 드신 어른들이 옆에 계시다는 거, 이런 맛이 있다.
나도 어머니께 애 취급 받으며 사는 덕분에 정신은, 마음은 어린 부분도 있으니까.
얼굴에 주름은 조글 조글, 언제 ‘할머니’ 소리를 듣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내 귀는 “에미야” 소리에 젖어, 내 마음은 아직도 철부지 엄마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지요” 라고 말 한 건
나를 위해 그런 부분도 있으니 200% 진심이라 하겠다.
그 말은 굴을 얻으러 갔다가 무 국으로 점심을 먹고,
(무를 나박썰기로 하지 않고 통째로 들고 앉아 칼로 얇게 한꺼풀 씩 착착착착 베어낸 것을
소금으로 간 하여 끓인 후 굴만 넣었을 뿐인데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었는지!!!)
방에서 뒹굴고 있는 메주를 보여주시며 어머니가 하신 말씀 끝에
“이번 된장은 담그겠지만 앞으로 내가 얼마나 된장 담그겠니. 내년을 모르는데…”
그러셨는데 갑자기 아! 어머니가 돌아가실 수도 있구나,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언제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겠고,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가 담가주신 된장을 먹고 있겠구나,
어머니 솜씨를 그리며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껴 먹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어머니와 얽히며 사연도 많았지만 나중엔 서로 의지가 된 시 할머님이
겨우내 먹을 알타리 김치를 한 독 담가 놓고, 쓰러져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두고 두고 하셨다.
“그해 겨우 내내 그 김치를 먹었는데 어찌나 맛이 있던지!
할머니 음식 솜씨가 좋으셨으니까…
이제 이 맛은 다시 못 보겠구나 하면서 어머니 생각 많이 했단다”
나도 언제고 된장을 떠 찌개를 끓이면서 그 말을 하겠구나….
그래서 역시 200% 진심으로 말했다.
“어머니, 이번에 된장 담그실 때 꼭 저 부르세요. 하루 전에 부르셔도 좋고요”
전남 고흥이 고향이신 어머니는 그야말로 솜씨가 좋아서 뭐를 해도 맛있게 하셨다.
예전에 어머니랑 같이 살 때, 3월 쯤이었나?
파릇 파릇하고 고소한 봄 동으로 겉절이를 무치고 된장 찌게를 약간 되직하게 끓이셨다.
조갯살 넣고…
그게 어찌나 맛있었던지 저녁을 한 단지 먹고 시간 되어 자리에 누웠건만 잠이 안 왔다.
너무 먹고 싶어서….
어서 날이 밝았으면, 그래서 어서 저걸 또 먹었으면 하고 잠을 설쳤다.
아침이면 어머니가 조그만 뚝배기에 하얀 쌀밥을 지어 주실 텐데, 날아, 어서 밝아라!
갓 지은 쌀밥, 보드랍고 쫄깃한, 다정하고 은근한 깊은 맛의 쌀밥을 한 입 넣고 그 향기와 맛을 즐기노라면
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축복이 내렸으면… 하는 절로 기도가 나온다.
여기에 봄 동 겉절이와 된장 찌개를 먹으면 또 얼마나 맛있던지!!!
어서 날이 밝아라…
이러면서 잠이 든 적도 있었다. ㅎㅎㅎ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은 다 담백, 소박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지만
특히 어머니가 만드시는 된장은 인근 일대에 소문 난 된장이었다.
그것만큼은 어디서 누가 만든 된장이라 해도 견줄 수가 없었다.
내 친구들 모두 어머니 된장 맛을 알아서 그것 좀 얻어 먹었으면 하고 몸이 닳지만
연세 지긋하신 어머니가 허리 아파가며 담근 된장을 달라고 할 염치는 없으니
나에게 졸라댄다.
“야, 네가 가서 된장 담그면서 배워. 여차하면 나도 불러라. 손 걷어 부치고 갈께”
이러던 판에 작년 가을, 어머니가 전화 하셨다.
“얘, 시골에서 전화가 왔어. 조카 딸한테….
걔가
‘고모, 이번엔 메주 어떻게 하실래요?
올해는 내가 콩을 안 해 가지고,
고모가 메주 필요하다면 동네에서 사서 메주 쒀야 하니까 필요하면 지금 얘기 하세요,
이러더라.
근데 우리 올 봄에 된장 좀 넉넉히 담가서 한 항아리 있잖니.
내년엔 그걸로 먹으면 될 거 같아서 필요 없다고 그랬다.”
나는 펄쩍 뛰었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된장은 묵힐수록 맛이 나는 거니까 해마다 담가둬도 좋잖아요.
메주 보내라고 하세요”
“아이고~~~ 된장 담그려면 그게 또 한 일이라 겁이 나니까 그러지….”
“글쎄 저를 부르시라니깐요. 이번엔 꼭 부르세요”
사실 어머니도 된장을 담그실 때마다 결심을 하시는 듯 하다.
이번엔 꼭 (입만 살은) 큰 며늘년을 불러야지… 하고.
요즘 잘 떠다 먹는 된장을 담글 때도 나한테 전화를 하긴 하셨다.
“얘. 오늘 시간 되니? 된장 담가야 하니까 좀 와라…”
나도 양심은 있어서 (그리고 그 비법을 배워 두라는 가족과 친구들의 압력도 있어서)
그럼요, 가고 말고요,,,, 하고 갈 준비까지 했었다.
근데 어머니가 그 사이에 살방 살방 집 앞 공원에 바람 쐬러 나가시더니만
거기서 다른 할머니 한 분을 낚으신 거다.
그리고 전화를 하셨다.
“에미냐? 아직 출발 안 했지? 그럼 그만 둬라. 올 필요 없다.
여기 공원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마침 옆에 앉은 노인네하고 얘기를 하게 됐어.
그깐 일에 뭐하러 바쁜 며느리를 오라 가라 하느냐고, 우리끼리 해도 실컷 한다고,
그 말도 맞는 말이잖니. 그래서 그냥 우리 둘이서 하기로 했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 제가 가려고 다 준비했는데 왜 그러셨어요”
어머니 대답은,
“너 일 시키기가 아까워서 그랬다”
매번 이러다 보니 나는 된장 항아리에 손도 안 대보고 폭 폭 떠다 먹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꼭 부르시려는지?
하여간 내 큰 소리, (대개는 헛소리가 되는 경우 다반사지만)를 믿으셨는지,
아니면 늘 그렇듯 내 부탁을 자르지 못하시는 어머니라 그러셨는지,
방을 들어다보니 큼직한 메주 열 장이 뒹굴 뒹굴.
이번엔 꼭 된장 담그러 가야지.
언제 장 담그실 거냐고 미리 물어서 그날 새벽같이 가던가, 그 전날 가야지.
가서 장도 담그고, 점심도 맛나게 해 드리고, 용돈도 듬뿍 드려야지.
어머니는 내가 해 드리는 건 뭐든 맛있다고 잘 드시니까,,,,
친정 엄마도 80이 넘은지 한참이시고, 시 어머니도 많이 늙으셨으니
하루 하루 날짜가 새삼스러워진다.
어머니들의 삶, 어머니들의 기억….
내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도 많은데, 돌아가시면 그대로 잊혀질 것이 아닌가.
된장 담글 날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주 뵙고 이야기 나눠야겠다.
어머니들 기억 속에 있는 우리 가족의 역사를 최대한 들어 둬야지.
특히 어머니들의 어머니들 이야기를 꼭 들어 둬야지….
그리고 잘 기록해 뒀다가 딸에게 전해 줘야지….
어머니들 마다,
“아이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 받아 적으면 소설이 열권이다” 라고 하셨는데
스무 권 분량은 확보했구만. ㅎㅎㅎ
이것이 진짜 족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