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 造化) 속에서
– 구상 –
울밑 장독대를 빙 둘러
채송화가 피어 있다.
희고 연약한 몸매에
색색의 꽃술을 달고
저마다 간드러진 태를 짓고
서로 어깨를 떠밀기도 하고
얼굴을 비비기도 하며 피어 있다.
하늘엔 수박달이 높이 걸리고
이슬이 젖어드는 이슥한 밤인데
막내딸 가슴의 브로치만큼씩 한
죄그만 나비들이 찾아들어
꽃술 위를 하늘하늘 날고 있다.
노랑,
빨강,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꽃가루를 옮겨 나르는 나비들!
이른 봄부터 밤마저 새워가며
그 수도 없이 날던 나비 떼들!
알록달록 채송화의 꽃물을 들이기에
저 미물(微物)들이 여러 천년을 거듭하는
억만(億萬)의 역사(役事)를 하였겠구나.
헛간 뒤 감나무의 짓무른 홍시도
입추(立秋) 전까지는 입이 부르트게 떫었으며
저 뒷동산의 밤송이도
가시를 곤두세워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만
알을 익혀 하강(下降)의 기름칠을 하고는
입을 제 스스로 벌렸다.
오오, 만물은 저마다
현신(現身)과 내일의 의미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지성(至誠)으로 도와
저렇듯 어울리며 사는데
사람인 나 홀로 이 밤
울타리에 썩어가는 말뚝이듯
아무 것도 모르며 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