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친구,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님.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는 나와 대학 동기다.
의예과 시절 같은 책상에서 같은 실험조에 늘 같은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다. 해부학 실험 그리고 힘들었던 공부, 숱한 추억들로 아른거린다.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긴 그는 축제 때마다 홍삼트리오의 ‘기도’를 기타 치며 불렀다. 간혹 담배도 피웠던 것 같고, 내가 골초인 만큼 그에게 얻어 핀 담배가 몇 가치는 되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을 마치고 둘 다 ‘부산 백병원’ 인턴 생활을 했다. 내가 인턴 대표라서 다른 인턴들이 못 다한 일들을 뒤처리 하느라 동분서주 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나의 짐을 덜어주었다. 다들 정신 없이 좇아 다닌 인턴 생활이었기에 그 나머지는 기억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없었다.
인턴 생활을 마치고 1988년 우리는 둘 다 육군 군의관으로 전방에 배치되어 서로의 안부도 모르는 채 군 생활의 첫 2년을 보냈다. 전방 군의관 생활 2년을 마치고 그와 나는 부산 군수사령부로 발령받아 왔지만 이내 그는 다시 부산을 떠난 임지로 갔고 나는 부산에 남았다. 우리 둘은 그렇게 잊혀져 갔다.
1991년, 내가 부산 백병원 외과 전공의를 선택할 때 비로소 그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나와 같은 과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전공의 모집 시험 때 그는 더 이상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광주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했다는 소식과 함께 사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정말 무사히 외과 수련을 마치고 종합병원 외과 과장으로 봉직 의사로 지내다가 1996년 경남 창원에서 개원의로 새로운 의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하이텔 유니텔 등 소위 인터넷 정보의 바다에 일찍 접했기에 병원에 연결해둔 인터넷으로 그와 조우하는 기쁨을 보게 되었다. 그가 어렵사리 위성으로 전한 몇 번의 이메일을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어느 날 그가 내게 영문 서류를 부탁했다. 로마유학에 필요한 영문 졸업장과 영문 인턴수료증이었다. 모교 대학 사무처에 가서 서류를 만들어 그가 알려준 로마 주소로 보냈다. 그리고 그는 로마 생활을 하고, 나는 개원의 생활을 이어갔다. 물론 그 사이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 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그는 나에게 로마 유학 중에 아프리카 수단을 방문했는데 나중에 사제가 되면 반드시 그곳으로 가서 봉사하리라는 얘기를 한 것 같다.
2001년 여름, 내가 부산에서 병원을 하고 있을 때 병원에서 가까운 송도성당에서 그의 사제 서품 후 출신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그 자리에 참석했다. 성전 맨 뒷자리에 앉아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그를 멀리서나마 바라보니 웬 지 모를 뜨거운 눈물이 났다. 무슨 강론을 했는지 도무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좁은 성전에 정말 많은 신자와 어머니 가족들이 오신 것만 기억난다.
미사가 끝난 후 성당 마당에서 그를 조우했다. 나는 얼떨결에 존칭으로 ‘이태석 신부님’ 하고 불렀다. 그는 나를 보자 마자 ‘잘 지냈냐? 무슨 친구끼리 말을 높이냐’고 하며 나를 겨 안아 주었다. 까맣게 그을린 그의 얼굴과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마치 이제 막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나온 신병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지의 아프리카 남수단으로 떠났다.
얼마 후 이메일을 통해 날아온 그의 수단의 생활은 성자의 모습이었다. 힘들게 케냐 나이로비에잠시 들릴 때만 위성을 통한 인터넷이 된다며 보내온 그의 안부와 사진들이었다. 낡은 움막 같은 흙벽의 진료실에서 고름이 베어나는 어린 소녀를 치료하는 사진 한 장은 나를 너무도 부끄럽게 했다.
그는 외로웠는지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편을 경상도 버전으로 번역한 글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리고 외과 수련을 받았더라면 더 좋은 치료를 해줄 병자들이 너무도 많은데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검은 눈동자와 검은 피부를 가진 어린 천사들과 어울리는 그의 사진들은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했다.
2002년 한창 의약분업의 폭풍이 몰아치던 시절 나는 의사협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그의 이야기를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그리고 2003년 톤즈 이야기가 방송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생활의 고단함에 잠시 그를 잊고 산 세월 중에 슬픈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의대 동기 카페를 우연히 들렀다가 듣게 된 그의 투병 소식에 나는 하느님을 원망했다. 나를 비롯한 뜻 있는 동기들의 모금도 그의 천국행을 붙잡지 못했다.
운명의 2010년 1월14일 그는 하느님의 품 안으로 돌아갔다. 내 뒷머리를 때리는 선종 소식에 나는 울음도 울지 못한 채 영등포 살레시오 집으로 향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과 추위 속에 그는 떠나며 웃었고 나는 울면서 그의 목관을 붙잡았다.
그러나 울음보다 희망이 살아남을 느꼈다. 그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더 많은 하느님의 종들을 불러 열매 맺게 하였다.
보고 싶다. 하느님 곁에서 지금도 바쁠 그가 정말 보고 싶다.
태석아! 좀만 기다리래이. 내 곧 니있는데 갈끼다. 내 마이 도와주꾸마.
-천주교 대전 교구 대사동 성당 은총의 모후 쁘레시디움 단장 이종기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