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신부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1
시작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저희를 성령의 은총으로 한자리에 불러 주시니 저희가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또한 세상 모든 이와 하나 되게 하소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기억하고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는 저희가 되게 해주소서. 아멘
선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사랑으로 타인에게 온정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라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 그분의 정신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많은 분들이, 그분의 정신을 살고 그분의 삶을 통해 기쁨을 살아가려면, 그분처럼 선한 지향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늘 이야기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1,2로 구성되었으며 지난 11월 21일 나눔을 위해 준비 되었습니다.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누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을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고 선한 지향의 거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여러분들 앞에서, 그분과 함께 사랑을 함께 나누었던 한사람으로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저의 작은 의무라고 생각하며, 또한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 함께 했던 여러분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마태오 복음 12장 46절에서 5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11월 21일 토요일 오늘은 전례력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자헌이란 말뜻은 성모님께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바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도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축성생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하느님께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한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을 보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문 밖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참된 가족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이며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산다면 진정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가족입니다. 형제들이 틀림없습니다. 맞습니까… 부인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누구를 안다고 하면서 경우에 따라 모른다 할 때가 있지요. 성경을 보면 그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면서도 수난 전날에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실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안다고 주님, 주님 하지만 모른다고 하면 그때 가서 나도 너희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있을까요.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예수님을 얼마나 믿고 있을까요.
이태석 신부님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이태석 신부님은 언제나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
절절하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그분 신앙의 고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지만 제게 다가온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은 하느님의 사랑이었고 그 사랑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려고 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태석 신부님을 그분 삶 전체를 통해 이처럼 고백하도록 하십니다. 매순간 사랑으로 사셨기 때문에 탄성에 가까운 이러한 찬송과 찬미가 울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은 한 분이라고 말씀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무엇인지도 예수님을 바로보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참고 이겨내시는지, 육화를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작아지셨습니다. 그래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도, 성모님께서 당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라는 사실보다는 그분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셨다는 사실이 더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사셨고 제자인 동시에 가족이셨습니다. 저는 이태석 신부님이 우리를 오늘 성모님 품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에 따라 모든 이를 형제로 받아들이셨고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들어 높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태석 신부님은 작아졌고 가난한 삶을 택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우리가 무엇을 구별하고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욕구이며 습관입니다. 사람들이 순간순간 이것저것을 구분하고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거룩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이미 거룩해진 것처럼 그리 살라고 그렇다고 우리가 이태석 신부님처럼 똑같이 살수는 없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몇 해가 흐른 지금 우린 ‘무엇을 구별하고’ 있는지 구별하여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우리 삶에 절대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공생활 내내 그분은 사실 의인 죄인, 이것저것 구별하지 않고 그들 모두와 함께 섞이셨습니다. 나병환자처럼 부정한 자에게도 손을 대어 섞이셨고 오늘 복음처럼 형제와 남들을 구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하느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혼돈과 구별을 모두 극복하신 예수님의 삶은 조화와 합일을 위한 새로운 창조와 다름없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살며 오늘 우리에게도 사랑을 따라 조화와 합일을 따라 살라 하시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마침기도
가로막힌 벽을 허물고 늘 낯설고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신 예수님, 저희에게 당신의 열린 마음을 허락하시어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2015_12_16
성바오로수도회 심재영 예로니모 수사
기도문 참조 : “바오로딸 야곱의 우물 11월호 복음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