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육체를 통한 길
우리는 자기 육체를 통해 자신에게로 다가가고, 자신 안에 머물 수 있다. 1970년대에 나는 몇몇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그리프 뒤르크하임Graf Dürckheim의 별장을 종종 방문했다. 뒤르크하임 덕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육체 안에서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신뢰하는 길로서 육체를 느끼는 동시에, 하느님을 향해 완전히 개방된 자세를 취하며 그것을 우리 안에 습관화하는 법을 배웠다. 뒤르크하임에게 육체는 인간 성숙에 필요한 도구였다.
육체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서 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이다.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그 사실은 바로 육체를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 즉, 자신의 팔을 편하게 두지 못하고 움츠린다거나 걸어가면서도 자기 안에서 붙들 것을 찾으려 자기 몸을 움켜쥐고 간다. 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사람을 보면 그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중심을 가슴 영역에 둔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강하고 결코 지지 않는 존재라고 밖으로 대단히 내세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서 있을 중심이 없다. 그들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이내 무너지고 만다, 서 있는 자세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는 감지된다. 육체는 단순히 척도만이 아니라 인간으로 성숙해 나기는 도구 역할도 한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 육체 안에서 내적 자세들을 훈련할 수 있다. 우리는 서 있는 동작을 통해 서는 능력과 자신을 믿는 마음을 훈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나무라고 해보자, 땅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다. 즉, 무게 중심을 발꿈치와 발바닥에 두고 서 있다는 뜻이다. 무릎을 구부리면 손이 땅에 닿는다. 콘크리트로 만든 전신주가 아니라 나무처럼 편안하게 서있다. 우리가 숨을 쉬면 발바닥을 통해 땅 아래로 날숨이 뻗어 나가고, 땅에서 머리끝 정수리를 통해 하늘까지 들숨이 뻗어 올라간다. 아래로 단단히 뿌리내리고 위로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처럼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 나는 서 있을 수 있는 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를 견딜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다. 나는 나를 향해, 내 안에 서 있다” 아니면 다음과 같이 성경 구절을 암송할 수도 있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 “언제나 주님을 제 앞에 모시어 당신께서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시편 16. 8)
나는 머리를 통한 길만으로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다시 체험한다. 몸 전체를 통한 훈련은 자기 안에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 훈련 한 번만으로 자신에 대한 영원한 믿음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당연히 다시 훈련하고 또 훈련해야 한다.
뒤르크하임은 ‘하라Hara’, 즉 아랫배로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게 중심을 아랫배에 둔다면 그것은 안정되고 튼튼한 자세이다. 그러면 누구도 쉽게 이리저리 흔들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자세가 있는 힘껏 땅에 말뚝을 박고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통하는 자세를 뜻한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하느님과 존재 자체, 뒤르크하임의 표현대로 본질을 향해 개방되어 있다. 이 개방 속에서 나는 안전과 확신을 느낀다. 매우 커다란 무엇인가를 향해 개방되어 있기에 자기 자신에게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으며 하느님에 의해 보호 받음을 느낀다.
나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의식적으로 ‘하라’ 자세로 서며 마음을 고요하게, 정신을 맑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의 도중 책상을 꼭 붙들거나 발을 이리저리 앞뒤로 바꾼다. 그런 자세들은 밖으로 표출된 내면의 불안이며 그것은 점점 더 커진다. ‘하라’로 서 있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신뢰와 개방을 위한 훈련이다. 여기서 나의 초점은 강의를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를 통해 어떤 큰 존재가 흘러가도록 하는 것, 즉 나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도록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돕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처럼 내팽개쳐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몸동작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차츰 회복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물론 몸 안에서의 변화는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 따라서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몸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몸을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개발하는 데만 이용할 수도 없다. 몸은 진지하게 행동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하라’는 보다 큰 존재를 위해, 즉 하느님을 위해 준비하는 자세를 뜻한다. 자신에 대한 참된 믿음은 자신의 요구와 척도에 대한 고집을 포기할 때 비로소 몸을 통해 서서히 성장한다. 우리는 자신을 놓아주면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우리를 내맡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느님만이 우리 자신에게 참된 발판과 자기 가치를 선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안셀름 그륀
2015_12_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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