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축제를 지냄 2
나는 자기 감정을 불신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만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도록 하는 말에 매우 쉽게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이름으로 요청되는 더 철저한 신앙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신다. 우리가 성령에 의한 고요한 내적 충동을 감지하고 자신의 감정을 신뢰하며 윤리·도덕주의자의 말에 마음이 졸아들거나 전전긍긍하지 않도록, 성령 강림의 불길은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원초적 표상과 만나게 해주는, 매우 친숙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이다.
고요하게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자주 성령과 만난다. 그분은 우리를 질식하도록 몰아가지 않으며 자유로운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본래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을 신뢰하는 사람은 종종 자신을 감싸는 파괴적 정신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그는 차츰 하느님이 그에게 만들어 주신 본래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간다.
교회력의 수많은 축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세상에 온 우리가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즉,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표상이자, 신적 품위의 표상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성인들의 축일도 해당된다. 성인의 축일은 각 성인들이 어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표현했고, 어떻게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냈는지를 가르쳐 준다.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여성에게 용기를 주는 축제인 성모 마리아 축일 역시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희망을 준다. 안타깝게도 마리아는 교회 내 일부 단체에서 여성들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약용된 적도 있다. 마리아를 과도하게 찬양해 그 밖의 모든 여성은 열등감을 갖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마리아 축일의 본래 의미가 아니다. 마리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기념하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행하신 바를 기념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를 기념하는 축제는, 우리에게 신앙의 표본을 제시한다. 즉, 주변의 모든 이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용기를 보여 준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 마리아는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그리고 그들 가까이로 하느님을 모셔 왔다. 이름도 없는 나자렛 출신의 한 여인이 용기를 내어 백성을 대표해 말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것이다.
전례는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도록 선택하신 이 여인의 신비를 매우 아름다운 표상들로 노래한다. 그 표상들 속에서 우리의 품위와 아름다움 역시 언제나 함께 드러나며,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도 탄생하기를 원하신다. 여성에 대한 당시 제도권 교회의 시각과 달리, 전례는 언제나 대단한 용기를 지닌 신학을 보여 주며, 마리아 축제 속에서 여성은 그 중심에 선다. 여성은 그리스도를 낳았으며 그 결과 구원이 이 세상에 왔다. 현대 여성 신학은 마리아를 비롯해 여성이 지닌 품위와 전례상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안셀름 그륀
2015_12_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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