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얼굴
-이해인-
나이 들수록 시간은 두려움의 무게로 다가서지만 이제
그와는 못할 말이 없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그에겐 늘 담담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
……
자목련 꽃봉오리 속에 깊이 숨어 있던 시간들이 내게 사
랑의 수화를 시작한다. 소리 없이도 우리는 긴말을 할
수 있다. 금방 친해질 수 있다.
……
시간이 어둠 속에 나를 깨운다. 잠 속에 뒹구는 어제의
꿈을 미련 없이 털어내고, 신이 나를 기다리는 아침의 솦
으로 가자고 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무로 돌린다 해도 진실히 사랑했던
그 시간만은 영원히 남지.
죽지 않고는 사랑을 증거할 수 없던 예수의 시간. 눈물
없이는 아들을 기다릴 수 없던 마리아의 시간. 의심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던 제자들의 시간. 믿고, 기다리고, 사랑
하는 사람들의 힘들고 아픈 시간. 이 모든 시간들 속에 거
듭거듭 태어나고 성장하는 너와 나의 삶.
사랑하는 이의 무덤 위에, 시들지 않는 슬픔 한 송이 꽃
으로 피워놓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 사랑으로 피 흘리며
행복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노을 속에 타고 있네. 죽
음이 끝이 아님을 믿고 또 믿으며 젖은 마음으로 내려오
는 길.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해. 기쁘게 살아야 해’라고
어느새 내 곁에 와서 신음하듯 뇌며 나를 부축하는 오늘
의 시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