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학 마치고 돌아가는 남수단 산티노 뎅씨 _ 가톨릭신문
원문보기 http://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77717
■ 이태석 신부와 함께
이태석 신부와의 첫 만남은 ‘의아함’이었다.
“잘 생기고 재능 많은 분이 왜 이 빈곤한 전쟁통 나라에서 고생을 하실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압니다. ‘사랑’밖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원래 음악을 좋아했던 산티노씨는 성가 소리에 이끌려 성당에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세례도 받았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호흡 곤란을 겪으면서 이태석 신부에게 치료를 받았다. 이 신부를 만난 후 아버지는 산티노씨에게 “톤즈에 가서 공부”하라고 권했다.
2007년, 톤즈에서는 콜레라가 유행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진료소에 환자들이 넘쳤지만 돌볼 손이 없었다. 이태석 신부 제안으로 진료소에 머물기 시작했다. 2명이 교대하면서 밤낮없이 진료소를 지켰고, 한밤중에도 아픈 사람이 오면 뛰어가 이 신부를 깨웠다.
“콜레라 무서워요. 정말 무서웠지만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돼’라는 신부님 말씀을 믿었지요.”
때를 놓쳐 치료할 수 없는 사람을 둘러싸고 가족들이 슬퍼했다. 아픈 가슴 저 깊숙한 곳,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결심이 자리 잡았다. 그 후 이태석 신부는 산티노씨와 친구들 곁을 떠나갔다. 남의 병을 치료하다가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하고. 하지만 산티노씨는 해마다 친구들과 함께 이태석 신부의 묘지를 찾는다. 그와 함께 쌓았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가 전해준 신앙 또한 꿋꿋이 지켜나갈 뜻을 다진다.
산티노씨는 아버지 넷째 부인의 외아들이다. 남수단은 일부다처제 사회다. 아직도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소(牛)를 지참금으로 여성을 주고받는 일종의 거래다. 게다가 산티노씨의 나이면 남수단에서는 거의 ‘노인’ 취급을 받는다. 평균 수명이 워낙 짧아서다. 산티노씨는 아버지와 달리 일부다처제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꼭 사랑하는 단 한 사람과 결혼해 그리스도교적인 ‘성가정’을 꾸릴 계획이다.
“수단의 전통문화와 관습들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가톨릭 신자로서 제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 남수단의 미래, 사람을 키워야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다 나쁩니다.”
남수단의 정치인들에 대해 물어보니 버럭 화를 낸다.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합니다. 끝없는 전쟁의 원인입니다. ‘안전할까?’ 하는 걱정 없이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남수단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이다.
“배고픈 사람과 먹을 것을 나누고, 아픈 사람 치료해주고, 싸움 말리는 것, 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학교입니다. 국민 75%가 문맹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꿈은 교육이다. 대학에서 토목학을 가르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공부를 해야 할 필요도 있다. 고등학교 교사도 좋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열어 줄 인재들을 키워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1년간은 남수단 100개 학교 짓기 프로젝트를 위해 봉사할 생각이다. 이 프로젝트는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원선오 신부(본명 도나티 빈센트·87)와 공 고미노 수사(본명 코미노 쟈코모·76)가 2012년부터 남수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교육 인프라 건설 계획이다.
아직 미래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받은 만큼, 더 많이 사랑을 나누겠다는 의지는 분명하다. 이미 넘치게 사랑을 받았기에.
산티노는 다시 말한다.
“슈크란 바바!!!”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