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가운 입은 ‘톤즈의 아이’…”고향서 이태석 신부 뜻 이을 것”
[머니투데이 부산=박보희 기자] [‘울지마 톤즈’ 배경지 남수단 출신 토마스 타반 아콧 인제대 의대 졸업]
고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 톤즈에서 미사를 봉헌할 당시 신부를 돕는 복사를 맡았던 청년이 한국에서 6년 간의 의과대학 생활을 마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다. 15일 부산 부산진구 인제대 의과대학에서 열린 ‘제34회 학위수여식’에 참가한 토마스 타반 이콧(33)씨가 의과대학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준 이종태(맨 왼쪽) 인제대 의과대학장, 백광현(맨 오른쪽)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 등과 이태석 신부 흉상 앞에서 감사인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와 정말 춥네요. 한국 겨울 너무 춥지 않아요? 아프리카에서 왔으니 추위에 적응하기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추워요? 별로 안추운데. 전 추위보다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이 더 힘들어요. 한국은 여름이 너무 더워요.”
부산 남포동 자갈치시장 뒷골목 백반집에서 얼큰한 아귀탕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온 아프리카 출신 토마스 타반 아콧씨(33)는 여름은 생각만해도 덥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토마스씨는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 출신이다. 멀지만 익숙한 이름의 ‘톤즈’는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2010년9월 개봉)의 배경이 된 그 곳이다.
토마스씨는 2009년 겨울 ‘한국에서 공부를 해 보지 않겠느냐’는 이 신부의 부름을 받아 한국에 왔다. 9년이 흐른 15일, 토마스씨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것도 이 신부가 졸업한 인제대 의과대학을. 아프리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가운을 입게됐다.
“아직 의사는 아니에요. 시험에 통과를 해야죠. 필기는 잘 본 것 같은데 실기시험은 잘 모르겠어요. 23일에 결과가 나오는데….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토마스씨는 지난 9~10일 의사 국가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토마스씨는 국시를 보고 졸업까지 한 지금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솔직히 졸업은 한 번도 생각을 못해봤어요. 공부가 너무 어려워서 그냥 ‘무사히 공부를 마치자’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런데 졸업이라니 아직도 실감이 안나요. 지금은 국시 합격이 목표에요. 일단 합격을 하고 외과 전문의 자격을 얻은 뒤 수단으로 돌아가야죠.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17년이 흘렀지만, 토마스씨는 이 신부와의 첫만남을 기억한다.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이 신부는 1991년 의사의 삶을 내려놓고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했다. 2001년 서울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 신부는 그해 겨울 톤즈로 떠났다. 당시 남수단은 오랜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곳, 톤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8남1녀 중 다섯째였던 토마스씨 역시 전쟁의 포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니던 학교는 전쟁으로 2년간 문을 닫았고, 돈을 벌러 북수단으로 떠났던 형제들과 연락이 끊겨 7년간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토마스씨는 16살 무렵 이 신부를 처음 만났다.
“성당에서 복사(성당 미사 때 사제를 돕는 사람)를 했거든요. 그때 졸리 신부님이 오셨어요. 집이 신부님 병원과 가까워서 자주 가서 놀았죠. 낮에는 축구나 농구도 하고, 집에 있다가 심심하면 신부님네 가서 젠가도 하고 다른 게임도 하고 그랬어요. 얘기도 많이 하고요.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신부님이 열명 정도 모아서 음악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전 알토 섹소폰을 맡았죠. 신부님이 가르쳐주셨어요. 나중에 브라스밴드(brass band)를 만들었을 때도 함께했죠. 정부 초정을 받아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울지마 톤즈’에 나온 밴드는 제 후배들이에요. 제가 1기 멤버고 그 친구들이 2기에요. 제 동생도 밴드에서 트렘펫을 불어요. ‘울지마 톤즈’ 영화에서 리코더를 불던 아이인데 그 아이가 지금은 수단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토마스씨는 이 신부를 ‘졸리(John Lee) 신부’라고 불렀다. 이 신부의 세레명 ‘요한(John)’의 영어식 이름에 성을 붙여 톤즈 사람들은 그를 ‘졸리’라 불렀다. 이 신부는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아이들을 모아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가르쳤다. 졸리 신부는 이들에게 선생이자 의사였고, 친구이자 부모였다. 이 신부와 8년간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동문수학한 백광현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은 이 신부에 대해 “톤즈의 가난한 청소년들을 맞아들이는 ‘집’이자 영혼과 육신의 병을 고치는 ‘병원’이었으며, 천진한 아이들과 뛰어노는 ‘운동장’이자 삶을 준비하는 ‘학교’였다”고 전했다.
“신부님은 항상 사람들로 둘러쌓여 있었어요. 신부님을 만나면 그냥 행복해져요.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 신부님을 찾아가면 아무 말 안해도 풀리고, 그런 신부님이 가진 에너지가 있었어요. 신부님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아프거나 건강하거나 누구도 멀리 하지 않고 반겨주셨거든요.”
이 신부는 2008년 휴가 차 한국에 왔다가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투병 중이던 이 신부는 자신이 가지 못하는 대신 톤즈의 아이들을 한국에 부르기로 했다. 톤즈의 아이들을 한국에 데려와 공부를 시키고 싶다는 이 신부의 요청에 수단어린이장학회는 후원을 결정했다. 지난 2004년 출범함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지금까지도 이 신부의 뜻을 기려 후원금의 90% 이상을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국 아동청소년 지원에 사용하고 있다. 이들의 뜻을 함께 하는 후원자들만 매달 4000~5000여명이 이른다. 그렇게 토마스씨와 존 마옌 루벤(31) 군이 한국에 왔다. 2009년 12월19일, 토마스씨는 그날을 기억한다.
“한국말을 하나도 못했는데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어요. 신부님처럼 의사가 되고싶었거든요. 연락을 받고 망설이지 않고 바로 ‘한국에 가겠다’고 답했죠. 오자마자 신부님을 만나러 갔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건강하셨었는데 살도 너무 많이 빠지고…신부님이 ‘먼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춥지는 않나’ 물어보셨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2010년 1월14일 이 신부는 끝내 이들을 남겨둔 채, 자신이 닮은 예수님 곁으로 떠났다. 토마스씨가 한국에 온지 한 달도 채 안됐을 때다. 이 신부는 떠났지만 토마스씨는 공부를 했다. 2년 뒤 존씨와 함께 인제의대에 12학번으로 입학했다. 의대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항상 누군가 있었다.
“당장 언어부터 어려웠죠.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부산에 왔는데 사투리는 또다른 언어인 것 같았어요. ‘밥 묵나'(밥 먹었니의 경상도 사투리)라는데 무슨 말인가 했다니까요. 지금은 재미로 사투리를 쓰기도 해요. 교수님, 동기들 모두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학교에서 방학이면 보충수업을 열어주기도 했고요. 국시 준비할 때는 아침 9시 도서관에 가면서 교수님께 ‘도서관 왔다’고 알리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이분들 없었으면 졸업 못했을 거에요. 물론 신부님께 제일 감사드리죠.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고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 톤즈에서 미사를 봉헌할 당시 신부를 돕는 복사를 맡았던 청년이 한국에서 6년 간의 의과대학 생활을 마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다. 15일 부산 부산진구 인제대 의과대학 강당에서 열린 ‘제34회 학위수여식’에 참가한 토마스 타반 이콧(33)씨가 동료 학생 107명과 함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토마스씨는 의대를 다니며 톤즈를 향한 이 신부의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됐다.
“한국에서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지위나 대접을 보고 신부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왜 이런 좋은 삶을 포기하고, 신부가 되고, 남수단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건지 저는 지금도 정말 궁금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정말 없어요.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전 지금도 궁금해요. 나중에 직접 여쭤보고 싶어요.”
이 신부는 생전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이 신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 집 근처 고아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의 모습, 10남매를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고귀한 삶, 이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 아름다운 향기”라고 답했다.
토마스씨는 의사가 된 후 한국에 남고 싶지는 않을까. 한국이 아니라도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싶지는 않을까. 이제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알고있는 그다. 더 많은 기회 역시 그 앞에 놓였다. 토마스 타반씨는 짧게 말했다.
“그러면 신부님이 슬퍼하실 거에요. 전 돌아가야 돼요.”
의대에서의 봉사활동은 그가 톤즈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더 무겁게 알려줬다. 인제의대는 학생들에게 이 신부의 정신을 심어주자는 취지에서 지난 2013년부터 ‘이태석 기념과정’을 개설해 운영 중이다. 토마스씨는 이 과정을 통해 지리산의 한센인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도움을 받던 톤즈의 아이가 한국의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자신의 손길을 더한 셈이다.
“사실 톤즈에 있을 때 한센병 환자들을 많이 봤어요. 신부님이 한센인 마을에 가서 미사를 하고 진료를 했는데, 그때 저도 도왔었거든요. 지리산에 갔을 때는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새롭고 행복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남수단) 환자들이 생각났어요. 그 사람들은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제가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토마스씨는 이 신부가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일들을 생각한다. 그가 톤즈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다.
“신부님이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있을 거에요. 신부님이 생각했던처럼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가깝게라도 가야돼요. 신부님의 마음을 계속 이어가야 돼요. 남수단에는 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많아요. 한 번도 포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힘들지만 포기할 수는 없어요.”
톤즈는 여전히 이 신부를 기억한다. 한국과 톤즈에서는 이 신부의 기일인 1월14일이면 그를 기리는 추모 미사가 열린다. 토마스씨 역시 졸업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전남 담양의 천주교 공원묘지를 찾았다. 이날 미사에 참석한 이들만 200여명에 이른다. 이 신부가 톤즈에 처음 문을 연 ‘톤즈 돈보스코 병원’은 ‘이태석 신부 기념 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규모도, 시설도 더 커졌다. 남수단 정부는 이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교과서를 준비 중이다.
‘졸리의 아이들’ 역시 이 신부를 뜻을 받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앞서 수단어린이장학회 후원으로 한국에 온 산티노 뎅(32)씨는 지난해 충남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남수단으로 돌아가 남수단 재건을 위해 힘쓰고 있다. 토마스 타반씨와 함께 인제의대에 입학한 존씨는 내과 의사를 꿈꾸며 내년 국시 합격을 목표로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 신부가 뿌린 작은 씨앗들은 싹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씨앗을 품은 열매들은 또 다시 자신의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하고있다.
“수단에 돌아가면 병원에서 일하면서 경험을 쌓을 거에요. 한국과 수단은 많이 발생하는 질병이나 처한 상황이 많이 다르기때문에 계속 공부를 해야 돼요. 나중에 경험이 많이 쌓여서 저를 믿어주는 분들이 생기면 병원도 만들면 좋겠죠. 물론 쉽지 않을 거에요. 특히 수단에는 의료장비가 많이 부족해요. 한국은 환자가 응급실에 오면 여러가지 검사를 할 수 있지만 수단은 그렇지가 않아요. 장비들이 없으니까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아요. 하지만 신부님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