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신부의 수단어린이장학회’ 가족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어느 해인가 이태석 신부님이 휴가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시며 “I Give you peace.”라는 가사가 반복적으로 들어간 노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당시 남수단의 현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평화가 신부님에게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을지 생각해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일 처음 “평안하냐?”(마태 28,9),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요한 20,21) 하고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우리는 매번 미사 중 평화의 예식을 통해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Peace I leave you, my peace I give you”)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인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각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제자들 소탕 작전’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마다 현상금이 붙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상황이 두려워서 불안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여인들의 기쁜 소식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히 스승을 배신한 처지에 예수님을 다시 만날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분의 평화는 바로 당신을 모른 척하고 부인했던 당신의 제자들에게 건네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였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을 용서하시면서도 제자들의 배신 때문에 생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요한 20, 20)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배신으로 생긴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당신을 배신한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심으로써 배신과 회피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제자들에게 화해를 청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나로 인해 고통 받는 타인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내가 받은 상처를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함께 어우러져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때 사용하는 영어단어 ‘sorry’를 살펴보면 ‘아픈,’ ‘상처’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sore’을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용서를 청하는 일에는 나의 잘못으로 생긴 상처에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평화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마주하며 용서를 청하고 베푸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첫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이태석 신부님이 예수님을 따른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당한 청소년들의 아픔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돈보스코라면, 이태석 신부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고 그들을 위해 온 마음으로 고민하는 그 자리가 우리 장학회의 신원이 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면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는 한층 더 깊이 신부님의 영성에 맞닿아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2023년에는 우리 장학회 가족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하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태석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또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태석 신부님이 남겨주신 평화의 향기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누십시오!”
글: 박해승 요한보스코 신부(살레시오회, 이태석신부의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