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이태석” 정본 전기 출간, 이충렬 작가 인터뷰

“신부 이태석”, 이충렬, 김영사, 2021. (표지 제공 = 김영사)

 

이태석 신부 10주기를 맞아 첫 정본 전기 “신부 이태석”이 출간됐다.

 

그동안 이태석 신부와 톤즈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과 다큐멘터리 등이 출판, 제작됐지만 이태석 신부가 선교사로 톤즈에서 살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과정을 구체적으로 다룬 전기는 처음이다. “아, 김수환 추기경”,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등 한국 전기문학을 쓴 이충렬 작가가 집필했다.

 

“신부 이태석”은 한국 살레시오회 지원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출판 인가를 받은 공식 전기다. 이충렬 작가는 ‘정본 전기’라는 조금 낯선 개념에 대해 한 삶을 부분 부분이 아니라 그야말로 ‘총체적’ 맥락에서 다룬 것이라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교차 검증해 기록한 공식 전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위해 여러 사람의 기억과 기록들, 이메일이나 기고, 편지 등은 물론 심지어 메모, 축일카드까지 들여다봤으며, 어린 시절 친구들, 의대 동창, 함께했던 사제와 수도자들, 봉사자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그는 단순히 에피소드의 대략적 내용이 아니라 이태석 신부가 수사 시절 로마 유학 중 다녔던 어학원 이름까지 확인할 정도였다.

 

이 작가가 만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한국 살레시오회의 백광현 신부를 비롯한 수사와 사제들, 수단에서 선교했던 이탈리아 살레시오회 공민호 신부, 이태석 신부를 톤즈로 이끌었던 인도 살레시오회 제임스 신부, 톤즈에서 일하며 마지막 1년을 지켜본 신경숙 의사, 인제대 의대 동창, 사제의 길로 이끌어 준 대전교구 황용연 신부 등이다.

 

그는 이들의 육성을 듣고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거나 공개되지 않은 일화도 기록했다. 또 이번 전기는 단순한 기록의 나열이 아니라 작가가 가졌던, 이태석 신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바탕으로 촘촘히 구성됐다.

 

"신부 이태석"을 쓴 이충렬 작가. (사진 제공 = 김영사)
“신부 이태석”을 쓴 이충렬 작가. (사진 제공 = 김영사)

 

“왜 전문의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어떻게 톤즈에 가게 됐을까?”
“그는 잃었던 성소를 어떻게 되찾고 살레시오회에 지원했을까?”

 

“이태석 신부는 살레시오회에 입회해 의사로서 남수단 톤즈로 선교를 떠나 수많은 이들을 치료하고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했으며, 48세 되던 해 암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많은 이가 알고 있는 이태석 신부와 톤즈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두 줄로 된 문장 사이사이에 있는 “왜?”, “어떻게?”라는 물음, 그리고 그가 이뤄 낸 결실들 이전의 인간적 갈등과 고통, 두려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충렬 작가가 물었던 여러 질문의 처음은 “왜 전문의 시험장에 가지 않았을까”였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좋은 의사가 되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진료 활동에 힘써도 되지 않았을까? 작가는 책의 첫 장에서부터 이 물음에 답을 찾는다.

 

“그러나 이태석은 시험이 시작될 때까지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종기(의대 동문)는 다시 한번 강의실을 둘러보았지만 이태석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시간, 전공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특별 휴가를 받은 33유류지원대 군의관 이태석 중위는 시험장에 가는 대신 부대 인근 전의성당 십자가 앞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13쪽)

 

이 순간 이후, 책은 어릴적 품었던 사제 성소를 내려놨던 이태석 신부가 어떻게 다시 사제 성소를 찾고 아이들과 같이 사는 살레시오회를 선택했는지 그 길을 더듬어 간다. 그리고 실습 과정에서 어떻게 톤즈의 아이들을 만났고, 왜 그곳에서 평생 살고자 했는지까지 도달한다.

 

이충렬 작가는 이 책을 쓰면서 이태석 신부는 영웅이 아니라 선교사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가 톤즈에서 지낼 때 톤즈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라이촉 마을의 한센병 환자를 처음 만났던 장면.

 

“그는 옷을 걸친 이가 거의 없는 한센병 환자들과 움막에서 올라오는 악취에 온몸이 감전된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의대 다닐 때 해부학 실습까지 한 그였지만, 50여 명의 남녀노소가 흙바닥에 누운 채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은 너무나 처참해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태석 수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차를 타고 왔던 길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계속 뛰어가다가 수풀 옆에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며 자신이 본 처참한 광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외쳤다. 주님, 어떻게 아직도 이런 곳이 존재합니까….”(112쪽)

 

이태석 신부는 이날 자신이 있기로 했던 곳에서 처음 도망쳤고,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올 때의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 작가는 이태석 신부의 첫 번째 넘어짐, 무릎 꿇음이 그가 선교사로서 살아갈 태도를 깨달은 첫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태석 신부는 당시 그렇게 참혹한 상황에서도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선교사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의술이나 교육사업보다 중요한 것은 친구가 되고 함께 사는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이 그의 10년을 가능하게 했다. 이태석 신부가 훌륭했다면 그것은 어려움,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 극복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영적 투쟁’은 40대의 젊은 그가 그토록 다시 가고 싶었던 톤즈에 대한 그리움, 아직 남아 있는 할 일들을 두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당시에도 오롯이 드러난다.

 

이충렬 작가는 “영웅은 너무 멀어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다. 이태석 신부의 삶이 영적 패배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이기도 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의 삶과 사랑, 하고자 했던 선교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며, 그것이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계속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런 뜻에서 이 작가는 책의 저작권을 수단어린이장학회에 넘겼고, 인세 전부를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책값의 10퍼센트가 장학회에 기부된다는 것은 책을 산 사람들이 수단 어린이들을 돕고 연대하는 데 참여하게 되는 셈이고, 그렇게 우리 모두가 이태석 신부를 기억하고 그의 삶을 우리 것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