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겨울, 미국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한국 방문을 계획하시며 가장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는 어떤 신부님을 방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느 신부님이실까? 라는 생각을 했고 어머니는 신부님 찾기 경험담을 들려주셨습니다.
그해 가을, 미국 본당 신부님께 “아프리카의 햇살은 아직도 슬프다”라는 책을 선물 받으시고 하룻밤 사이에 다 읽으신 어머니는 이태석신부님이 이뤄내신 큰 일들에 감동 받으셨고, 그 날 밤 독수리 타법으로 신부님과 관련한 카페를 찾으셨습니다. 신부님을 만나기 5년 전, 어머니는 대장암으로 투병하셨습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는 빠른 수술 후 다른 치료도 없이 완치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어머니는 신부님을 꼭 만나야 한다는 목표와 목적이 있었습니다. “6학년인(60대) 나도 완치 했으니, 신부님도 힘내셔서 완치하셔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카페를 찾아 둘러보며 많은 운영진 중 “이화”님이 어머의 눈에 띄었습니다. 단순하게 우리 3남매가 이화여자대학교부속초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이화님께 쪽지를 보내어 신부님을 꼭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적극적이시고 친절한 이화님은 바로 다음 주일, 함께 대림동 수도원으로 어머니와 저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이화님은 제가 지내고 있는 곳에서 5분 거리에 거주하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화님의 남편분은 아버지의 초등학교 또 대학교 후배이기도 했습니다.
약속한 주일 아침, 이화님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대림동 수도원으로 향했습니다. 미사 전부터 두리번 두리번 거렸지만, 신부님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미사 중간쯤 뒤쪽에 패딩과 비니를 쓰신 키 큰 신부님이 들어오셨습니다. 한눈에 봐도 그분이 신부님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짧게나마 신부님과 같은 공간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윗층에 있는 신부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지속적으로 신부님을 응원하며, 어머니의 투병일기 및 다음해 다시 방문시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출판된 따끈한 신부님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도 신부님의 사인과 함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신부님과 담소를 나누며 어머니와 신부님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 드렸습니다. 그러던 중 “다 함께 사진 찍어 드릴까요?” 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고민없이 “네”하며 카메라를 건넸던 것이 그녀와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녀는 남수단에서 일년을 신부님과 함께 의료 봉사 후 돌아온 신경숙 데레사 이사님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남수단에서 돌아와 주일마다 대림동 수도원에서 미사도 봉헌하고 신부님을 뵈러왔던 차에 우리 모녀의 수다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몇몇 분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소중한 인연은 그날을 시작으로,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언니, 친구 또는 가족같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을 만나고 얼마 안되어 12월 4일 존과 토마스가 한국으로 공부하러 오게 되었고 그 다음해 산티노까지 함께한 유학생위원회를 시작으로 언니와의 인연은 깊어만 갔습니다. 지금까지 언니와 함께 만난 많은 친구들을 비롯하여 훌륭한 신부님들, 수녀님들은 마치 예전부터 우리의 인연을 하느님께서 촘촘히 이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비록 신부님은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라고 하셨지만, 신부님은 두 달 후 선종하셨습니다. 대신 저에게 친구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언니가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내민 손은 저에게 친구가 되자는 손이었고, 저는 그 손을 덥석 잡은 셈이었습니다.
언니를 통해 들은 수많은 이태석신부님의 이야기들을 통해 저도 신부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톤즈는 마치 여러 번 방문한 곳 같습니다. 마치 신부님께서 계셨던 그때에 신부님과 또 언니와 함께 생활한 것처럼.. 언젠가 꼭 언니와 함께 그곳에 가서 그동안 이야기로만 들었던 생동감있는 신부님의 발자취를 밟고 싶은 게 저의 버킷 리스트에 있습니다.
민안젤라 / 이태석신부의 수단어린이장학회 총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