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이 지난 18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 인터뷰실에서 이태석 신부의 사진을 옆에 놓고 자신과의 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정하종기자 maloo@munhwa.com
이재현(왼쪽) 이사장이 생전의 이태석 신부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아프리카 오지 봉사의 행적을 담은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로 대한민국을 울렸던 사제 고(故) 이태석 신부. 그는 피부색과 국경의 구분 없는, 헌신적인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남기고 갔다. 그런데 이 신부와 사실상 의형제의 연을 맺고 사제 서품을 받은 날부터 선종하기까지 10여년간 바로 곁에서 수단 사랑을 함께 실천해온 인물이 있다. 그는 뜻밖에 종교단체 관계자도, 사회복지 종사자도 아닌, 환경부 기후대기정책관으로 근무 중인 이재현(50) 국장이다.
2000년 6월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국 요원으로 파견나갔던 이 국장은 그해 11월 수단으로 들어가기 위해 케냐에 들른 이태석 신부를 처음 만났다. 이때 비행기를 기다리던 이 신부에게 “우리 집에 와서 묵으라”고 한마디 권했다가, 2010년 1월 암투병 끝에 선종할 때까지 10년 동반지기가 될 줄은 그도 몰랐었다.
이 국장은 기자에게 “언론이 이태석 신부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건 좋지만, 너무 신격화해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한 인물로 과장하는 것은 걱정”이라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 신부처럼 할 수 있다. 그는 우리 곁에 살던 여느 이웃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 아프리카로 날아온 초짜 신부 이태석과의 첫 대면 = 이 국장은 광주살레시오 고등학교 시절 가톨릭에 입문했다. 이탈리아인 신부로부터 “너도 신부가 돼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을 세 번이나 휴학하며 어렵게 학업을 마친 그는 행시 31회에 합격하면서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환경부에서 근무하던 그는 2000년 아프리카 유엔기구에 파견나갈 기회를 잡았다. 환경 담당 공무원으로서 국제업무 감각을 익히고 싶었던 것. 도착해 수개월 동안 현지 한인성당의 신도회장으로 신앙생활을 겸하던 이 국장은 그해 11월 이태석 신부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이 신부는 로마 교황청 살레시오대 유학을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였다. 아프리카에서 온 동료 사제를 따라 1년 전 톤즈 마을을 갔다가 영감을 받은 이 신부는 정식 신부가 되자마자 파견을 자청, 수단으로 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이 국장은 이 신부를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로 묘사했다. 다만 웃음이 떠나질 않고 쾌활하게 대화를 나누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는, 어찌 보면 철없어 보이는 젊은 사제였다. 이 신부 38세, 이 국장 40세 때의 일이다.
◆‘쫄리’의 열정에 전염되다 = 이태석 신부의 세례명 요한(존)에 성을 붙인 ‘존 리’라는 이름을 현지인들은 ‘쫄리’라고 불렀다. 2000년말 쫄리 신부는 톤즈 마을에 학교를 세울까, 성당을 세울까 고민하다가 병원을 먼저 세웠다. 나병환자를 비롯해 의료 혜택이란 문명을 접해 보지 못한 톤즈 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신부는 손수 흙벽돌을 찍어 움막집을 지었어요. 그가 노트북에 저장해온 사진파일들을 보며 내가 ‘이게 무슨 병원이냐’고 하자 침대에 청진기, 페니실린 주사만 있으면 병원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의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슬픔에도 이렇게 종류가 많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감정을 잃은 표정, 쓰러져 지친 모습, 손이 뭉개져 있는 환자…. 내가 문명사회에서 봐온 장면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들이었죠.”
의료봉사부터 시작한 이태석 신부는 처음엔 의사의 모습이다가 점차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모습, 악기를 연주하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특히 권위와 형식을 싫어하는 이 신부는 기도를 할 때도 앞에서 성직자란 권위로 앞장서 이끄는 게 아니라, 사람들 한가운데 들어가 같은 방향을 보며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부는 그 누구에게 ‘뭘 해달라’고 부탁하는 법이 없었다.
“내게 신부님이 먼저 무엇을 해달라 요청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장면도 못 봤습니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는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사람이었어요. 도대체 천태만상의 군상들과 그가 어떻게 친구를 맺는 걸까 궁금했어요. 다른 선교사들도 많이 알았지만 그들은 아프리카인의 친구가 되는 데는 실패하더군요. 논리보단 감성으로, 유형의 물질보단 정신으로 통했다고 할까요? 선교의 첫걸음은 그 아이들의 친구가 돼 주는 것이라고 신부님은 말했지요.”
◆ 수단어린이장학회의 탄생과 이태석 신부의 죽음 = 이 신부의 ‘선교 열정’에 전염돼 당초 2년의 아프리카 파견기간을 3년으로 늘렸던 이 국장은 2003년 직접 톤즈 마을을 찾게 된다. 여기서 이 국장은 정말 충격을 받는다. 밀림의 왕국 아프리카에는 초록색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보통 마을 근처에 들이 있고 풀과 나무를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톤즈는 누런 사막 색깔인 거예요. 옥수수를 조금 키우는 것 말고는 경작물도 전혀 없었어요. 생명의 빛이 안 보인다고 할까?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신석기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농사 지을 여력도 없어 하루 한끼 풀뿌리죽을 먹고 연명하더군요. 아프리카 여러 곳에 가봤지만 이런 데는 없었습니다. 비로소 이 신부가 우리에게 100분의 1도 제대로 말을 안해 줬다는 걸 알았어요.”
2003년 6월 한국에 돌아온 이 국장은 ‘왜 날 톤즈로 오라 했을까’ 고민했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나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알리는 데는 돈이 안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겪은 ‘지구상에 이런 곳도 있다’는 사실을 노트 한 권에 빽빽이 기록해 ‘아프리카의 햇살은 아직도 슬프다’란 제목을 붙여 여기저기 배포했다. 반응이 없다가 그해 12월 KBS TV에 처음 사연이 소개됐다. 이를 계기로 대학생 봉사자들이 모여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점차 회원이 늘어갔다. 이태석 신부의 첫 한국 휴가날인 2004년 7월에 맞춰 회원들과 일일찻집과 작은 음악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모인 돈은 아프리카로 보냈다.
2006년 이 신부가 한국으로 두 번째 휴가를 나올 무렵에는 초기 어려움이 극복되고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제2회 음악회 수익금 2000만원을 톤즈 고등학교 설립자금으로 보내고, 2007년 정식으로 수단어린이장학회를 출범시켰다. 1인당 5000원, 1인 1계좌 운동을 통해 톤즈 아이들을 돕자는 취지였다. 2008년 11월 제3회 음악회에서 자작곡 ‘슈쿠란 바바’(아프리카어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부르던 이 신부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지 못했다. 신체검사에서 암이 발견되고 이때부터 입원해 1년의 투병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0년 1월 그는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 사랑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 10년 동안 이 신부를 돕던 이 국장은 유지를 받들어 수단 유학생 3명을 한국으로 초청, 연세대 어학당에서 공부시키고 있다. 3명 중 한 명은 이 신부의 모교인 인제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고, 또 한 명은 농사를 배워 톤즈에 잘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아들이요, 분신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작은 불씨는 1만9000명의 카페 회원과 정기 후원자 5000여명으로 남아 있다.
이 국장은 올해 1월 선종 1주기 추모미사와 더불어 제4회 수단 어린이 돕기 음악회를 열었다. 이태석 신부가 작사·작곡한 곡을 모아 추모음반도 제작했다. 이 국장은 꼭 아프리카가 아니라도 각자 살아가는 공간에서 조그마한 것부터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게 첫걸음이며,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실천하는 방법이 생긴다고.
“나도 신부님을 만나기 전에는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였어요. 일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가정과 직장의 의미를 새롭게 보게 됐어요. 남을 돕는 사람들은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인터뷰= 노성열 사회부차장 nosr@munhwa.com
관련 링크: <사랑 그리고 희망 – 2011 대한민국 리포트>“모든 이의 친구 ‘쫄리’에 반해 동행 10년… 나눔의 씨 뿌렸죠” :: 문화일보 mun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