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전 서울대 교수가 1980년 5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감금됐을 때의 일이다. 밤낮 지옥 같은 심문을 받던 그는 옆방에 수감된 어느 목사가 시체처럼 어두운 얼굴이 된 것을 보고 우여곡절 끝에 자기가 가진 성경책을 반으로 찢어 목사에게 건넸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목사의 방에서 찬송가와 기도 소리가 들리고 휴지처럼 구겨져 있던 목사의 표정이 확연히 밝고 맑아졌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아끼던 성경을 불경스럽게 반으로 찢었음에도 자신이 갖고 있던 희망은 되레 두 배, 세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희망은 나눌수록 더 강해지는 법임을 깨닫게 됐다”며 “부활의 한 편린을 벅차게 느꼈다”고 어느 책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고 이태석 신부 추모는 개인과 사회 부활의 의지
그를 통해 이 시대 위기와 희망 생각해 봤으면…
그의 경험담이 아니어도 부활은 개인이 죽음의 심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기에 절망의 음습한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희망의 빛 속에 안기는 것 같은 대 반전의 환희가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본다. 하지만 이처럼 극적인 체험을 해 본 사람은 드물기에 대개는 부활을 종교적이거나 심리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만다. 부활은 용어를 달리하면서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나 국가, 혹은 인류 차원의 개념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누구나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거듭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를 회복시키려는 구체적 노력은 한 움큼만치만 힘겹게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고단한 삶을 강요하는 물질만능의 거대한 조류를 막아 줄 공동체로 부활하는 꿈을 꾸지만, 실제 이뤄지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개인적인 차원이든, 사회적인 차원이든 부활을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최근 부산에서 새롭게 일고 있는 고 이태석 신부에 대한 추모 움직임은 의미가 작지 않다. 자신을 ‘졸리 신부님’이라 부르던, 아프리카 수단의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일생을 오롯이 바친 이 신부의 정신을 기리려는 것은 개인적인 삶의 태도를 바꾸고 사회 전체에 희망의 기운을 북돋우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 신부의 정신을 부활시켜 스스로나 사회를 부활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활을 일상에서 실체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산 출신인 이 신부를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엊그제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앞으로 국내외 의료봉사 지원 등 다양한 후원과 나눔 운동을 펼칠 것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 6월께 500여 명의 시민을 모아 ‘부산사람 이태석 신부 기념사업회’란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고맙게도 이미 활동 중인 이 신부의 후원 조직 수단어린이장학회에 대한 지원도 정관에 명시키로 했다.
이 신부가 보여준 귀한 정신은 이미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큰 강으로 흐르며 부활하고 있다. 그의 사랑과 희생을 보며 어떤 사람은 착하게 살 것을 결심했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이웃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감동을 받고도 막상 일상으로 돌아서면서 이를 마음 한편에 내려놓고 말았겠지만, 이런 것들도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는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통째 바꿀 것이니 큰 강이란 표현은 과장된 게 아닐 터이다.
한 대학교수가 불안과 공포만 가득한 지하 감방에서 고초를 견디지 못하던 목사에게 부활의 감동을 느끼게 한 것처럼 이 신부는 암울하기만 한 사회 속에서 자기만 알며 살던 이들에게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를 통한 부활의 감동을 선물했다. 그리고 이제 그 정신이 부산에서 다시 하나로 모아지며 또 다른 차원의 부활로 의미를 넓혀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참석자들이 다짐했듯 기념사업회가 늘 낮고 작은 마음으로 겸손하게 활동하면서 이 신부의 향기를 퍼뜨려 사회가 새롭게 나는 데 큰 힘을 보태 줬으면 좋겠다.
내일 모래가 부활절이다. 정진석 추기경은 부활메시지에서 우리 시대가 현재 맞닥뜨린 불행의 원인은 삶의 모든 것을 경제 중심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추기경의 자성처럼 우리 교회도 그런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개신교계는 최근의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비리 파문’과 일부 대형 교회들의 잇단 추문으로 여지껏 비난을 사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 돼 버렸다. 우리 사회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때이기에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이 신부를 통해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을 듯싶다. 지금 어디선가 이태석 신부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다. hlee@
관련 링크: [이현 칼럼] 졸리 신부의 부활 –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