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창작악단 거문고 주자 이선희씨 고 이태석 신부 삶에 감명 기부로 제2 인생
마흔 살이 된 어느 날이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고 이태석 신부의 생애를 그린 영화 ‘울지마 톤즈’였다.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그곳에서 헌신적 사랑을 실천한 고인의 이야기는 한 예술인의 삶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이선희(43·여)씨의 20년 넘는 거문고 가락에는 이제 ‘나눔의 삶’이 실려 흐른다.
“저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서 중학교시절,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늘 기도를 했어요. 제 문제를 풀어주시면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고. 이후 문제는 해결됐지만 오랫동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고 살다 마흔이 넘어서야 이태석 신부님을 제 마음에 모시게 됐어요. 신부님처럼 인생 자체를 헌신하지 못하지만 제가 지닌 재능으로 보답하며 살겠다고 말이에요.”
이씨가 나눔을 실천하고자 첫 콘서트를 연 것은 2011년 6월 서울 삼성동 민속극장 풍류에서였다. 그는 이 공연에서 수익금 전부에다 얼마를 더 보태 수단어린이 장학회로 보냈다.
이후 여러 차례 열린 독주회 수익금도 모두 기부했다. 또한 뜻이 있는 무대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거문고를 켰다. 이씨는 자신의 거문고 연주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재능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교 때 KBS국악관현악단에서 대학생 협연자를 뽑았어요. 첫 오디션에서 떨어졌는데 당시 돌아가신 지휘자 선생님께서 낙방이유를 말씀해 주셨어요. ‘네가 그린 세계가 너무 작다’고 말이죠.
연주자는 궁극적으로 연주기법이 아닌 그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어요. 그 말씀은 제게 화두처럼 자리 잡았고, 정신과 마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러다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지점에 도달했고, 그에 대한 답은 ‘나누는 것’이었다고 한다. 연주는 감상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이씨에게 감상자는 인생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그가 재능기부에 나서는 까닭이란다. 이씨는 아티스트라고 해서 절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티스트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음악이 빛을 바래요. 제 재능은 먹고 사는 수단이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은 아티스트라기 보다 직업인으로서 일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애쓰고 따뜻한 마음으로 나눔을 하며 살아 가야지요. 결국 그것이 아티스트라고 생각하기에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중이에요.”
이씨는 조만간 뜻을 같이 하는 제자들과 거문고 중주단을 꾸려 재능기부 활동을 보다 확대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 모임에는 문화를 나누는 것과 함께 숨은 뜻이 담겨 있다. 취업난을 겪고 있는 제자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고 우리 악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넓힌다는 취지란다.
“국악계도 청년실업이 심각해요. 국악관현악단이나 여느 단체에 들어가지 못하면 무대에 설 기회조차 갖기 힘든 실정인 거죠. 자신이 힘든데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겠어요? 그래서 좋은 일도 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내고 싶어요. 국악계에서 교수 아니면 악단 단원, 1%만 잘 사는 분위기가 아닐 수 있게 말이죠.”
그러면서 이씨는 보다 많은 동료들과 함께해야 나눔 무대가 더 큰 힘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좋은 일을 할 때 좋은 기운이 모인다.’ 그가 강조한 대목이다.
애초 독주회로 나눔 무대를 시작했지만 신기하게도 많은 친구들이 생겼고 응원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씨의 취지에 공감해 선뜻 돕겠다는 연주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그어놓은 국경을 매일 만들면서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런 메마르고 단절된 틀에서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행복한 일일 거예요. 아직 저는 부족하고 한참 멀었지만 다른 나누는 삶에 귀 기울여보세요. 제 말을 실감할 거예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거문고 연주자 이선희씨가 인생 2막에서 삼은 모토다.
박길명 기자 ghost@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