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남수단 굼보 마을 이야기
오늘이 2014년 1월 4일 토요일, 주바 사태가 일어난 지 3주가 지났고 반군과 정부군의 협상을 이루려 이웃 나라에서 많은 노력을 하였고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협상 중이던 것이 오늘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짧은 시일에 많은 것을 체험하게 해 주시는 주님께서 이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며 기도한다.
오전에 주바 교구청에 미팅이 있어 다녀왔다. 다음 주 화요일, 수요일은 각 성당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 것이며 목요일 오전 11시에는 주바 교구좌 성당에서 시국 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사 오는 도중에 평화를 위한 행진을 성당별로 함께 하고 오기로 하였다.
오후 점심 먹고 나서(2:00pm) 데빗 신부님과 함께 먹을 음식(밀가루, 설탕, 우유, 양파, 콩, 식용유 와 돗자리)을 차에 싣고 굼보 미션 동쪽 마을에 다녀왔다. 이 마을은 비어 있었었는데 그저께부터 보르와 망갈라, 모그리 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딩카 족이었다. 누엘족이 살던 마을인데 딩카 족이 무서워 돈보스코에서 잠깐 머물다 유엔 난민촌으로 떠났고 보르 쪽에서 누엘족이 무서워 도망 오고 있는 딩카족들의 처음 피신처가 된 장소가 되었다. 마음이 싸아했다.
2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고 어른들도 많이 있었고 잘 걷지 못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가져온 식량 물건을 중앙에 펼쳐 놓으니 어른, 아이, 구별 없이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데빗신부님이 아라빅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다시 딩카 언어로 통역을 하였다. 가져간 것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대표를 통해 잘 나누라는 당부 말씀인 듯했다. 지난번 누엘족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이 딩카족에게도 사랑의 나눔을 하는 게 교회임을 실감하였다. 나는 아라빅도 모르고 딩카어도 모르니 대충 알고 이해한다. 그리고 어느 가정을 방문하였다. 어제 데레지냐수녀와 레뎀타 수녀가 치료차 신부님과 함께 왔었는데 그때 아가를 분만한 아낙이 있었다. 잘 살던 누엘 족의 집인 듯, 방 안이 번듯했다. 그곳에서 딩카 여인이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이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장소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일 밤은 이들을 학교에 와서 지내게 하겠다고 신부님이 말했다. 그리고 유엔의 조치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점점 데드라인이 오는 듯 신부님이 사태가 발생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했다. 우리는 주바로 가려고 배낭 하나씩 싸놓고 있다고 하니까, 주바에서 일이 터질 텐데 어떻게 주바로 가느냐 했다. 사실 나는 주바 로칼 수녀원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옮겨 놓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었다. 신부님은 Numule쪽(우간다 국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자동차를 많이 가져가면 위험하니까 두 대만 가져가자고 했다. 돈보스코 미션 안에 있는 사람을 세어 보니 22명이었다. 우리 엠블런스와 똑같이 생긴 돈보스코 자동차 한 대를 기름을 가득 채워 놓고 있자고 했다. 뭣인가 그림이 그려진 듯하였다.
오후 4시에 토요 미사가 있었고 이어서 대형 십자가를 들고 기도하면서 평화를 위한 행진을 굼보 마을을 크게 돌면서 하였다. 아이들이 앞서고 뒤이어 성가대 그리고 어른들 수녀 8명과 신부들은 사이사이에서 함께 했고 마이크사용을 하면서 묵주 기도와 성모님 노래 등을 아라빅과 영어, 부족어로 섞어 가며 하고 돌아오니 밤 7시가 되어 어두웠다. 저녁밥 먹고 잠깐 조배 한 후 일지를 쓰려고 하는데 너무 잠이 쏟아졌다. 9시가 채 안 되었는데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비몽 사몽 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저쪽의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Sister, fighting starting in Juba. If something happen don’t come outside.” 데빗 신부님의 알림이었다. 잠이 달아났고, Sister들에게 알린 후 제의실 쪽으로 가서 주바 쪽을 쳐다보니, 한쪽이 화염에 싸여 있었다. 아니 연기는 안 보이고 센 불꽃만 선명한 색깔로 보였다. 일이 터졌구나. 오늘 협상이 결렬되었다더니, 이미 특공대를 잠입시켜 대통령 관저를 침입하고 삽시간에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전술이구나. 혼자 상상에 상상을 더하면서 사제서품식 6시간을 꼬박 성당 자리를 지키시던 우리 대통령이 이제 죽게 생겼구나 하며 거의 잠을 자다 말다하면서 묵주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어제 예정 한데로 보스코수녀님과 유엔 캠프에 미사 가기 위해서 서둘렀다. 아침 8시에 제이콥신부님과 함께 떠났다. 미사가 9시이지만, Main Gate로 들어가기 위해 어제 여권 사본을 보냈고 오늘 아이디를 준비해 가야 하며 아르헨티나에서 온 유엔에서 일하는 여성 아일린이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나일강 다리가 봉쇄되지 않은 것을 보니, 어젯밤에 별일은 아니었나 보다 하고 혼자 생각하며 주바 타운을 지났다. 유엔 정문에 DMI 인도 수녀 두 명과 신부님이 기다리고 있었고 조금 후에 이 헌신적인 신자 여성과 유엔 자동차로 미사 장소까지 들어갔다. 미사 장소는 북적대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유엔 병사가 지키고 있는 유엔 지역 바로 거기였다. 누에르족 신자들이 많이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 굼보 성당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었고, 정확한 전례를 갖추고 있었다. 전통악기(하프처럼 생김) 대형 1개 중형 3개, 전통 북 3개 – 탬버린이 한 개 있었다. 8명의 예쁜 여자 어린이들이 이들 특유의 단순한 전통춤을 선두로 향복사와 일반 복사들에 이어 두 명의 사제 입장이 있고 계속 노래가 이어졌다. 굼보 성당은 주로 바리족들의 전례였었고, 이들은 누에르족의 전례인 것이다. 비슷하지만 언어가 틀리고 몸짓이 달랐다. 성가대 쪽의 두 명의 남자와 지휘하는 젊은이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렇게 몰입하면서 노래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런 상황이니 저렇게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얼굴과 표정으로 애타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강론 때 신부님은 평화에 대해서, 화해와 용서를 위해서 이야기했고 간혹 사람들이 웃었다. 봉헌시간에 바나나 사려고 가져간 돈 25ssp를 나도 봉헌하였다. 봉헌하는 사람들이 보통 성당처럼 많이 줄을 섰다. 평화 인사 때 정말 기뻤다, 정말 기뻐서 많은 시간을 손을 내밀며 평화를 빌었다. 아이, 어른, 남녀노소 모두 평화롭고 기쁜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저쪽에서 이 구역을 지키고 있는 유엔 병사들과도 평화의 악수를 하였다. 신부님 쪽만 카고 콘테이너로 생긴 그늘이 조금 있을 뿐 모두 뜨거운 햇볕 아래서 두 시간 넘게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미사 끝에 회장격인 사람이 신부님을 소개했고 수녀들도 소개했다. 코리아에서 자판에서 인디아에서 왔다고 하니까 모두 박수를 쳤다. 과연 우리가 박수받을 만한 사람들일까, 떠나지 않고 이들과 함께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하느님 앞에서는 이들이 사랑받고 박수받을 것이 확실하다. 왜냐면 이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정치하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이, 감옥 아닌 감옥으로 와서 제한된 시간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미사 후 조금 이야기를 몇몇과 더 하다가 사람들이 거의 떠난 후에 우리도 그 장소를 나와서 사람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지역을 자동차로 천천히 갔다. 열흘 전에 왔을 때와 오늘은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 왔고, 장사하는 사람이 늘었고, 이발소까지 생겼다. 밖에서 하던 직업을 그대로 가져온 듯했다. 화장실이 생겨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고, 물은 여전히 부족하여 즐비하게 놓여 있는 파란색 드럼 물통 주위에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튼튼한 많은 남자들이 단체처럼 함께 누워 있거나(저들의 안방이니까) 또 한편에서는 주바 타운에서 보던 것처럼 찻집에 많은 남자들이 모여 토론 비슷하게 하는 모습이 거의 사람 사는 정경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소리 없는 절규의 현장을 나와 유엔이 만든 임시 병원으로 갔다. 사건이 터지던 날 총탄에 다쳐 누워 있는 남자들이었다. 어제까지 복도에도 환자들이 가득 있었다고 했다. 정말 전쟁을 불사했다. 여기저기 터져서 붕대를 감고 있는데, 가장 답답한 것은 목발이 없으니까 돌아다닐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안 돌아다니는 게 더 나을까. 더 화가 치밀어 가슴에 화병만 남을 수도 있을 거니까. 동양 의사, 간호사가 있었고 모두 유엔 소속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하니, 약품이라고 하였다. 아르헨티나 여성이 말하길, 옷, 약품, 음식 모두 필요하다고 했다. 이곳을 빠져나와 유엔군이 살고 있는 쪽으로 갔다. 잘 차려진 막사 안으로 가니 조금 평화로움을 느꼈다. 피난민 중에 아이 딸린 여성을 데려다 놓은 곳이었다. 어제 막 출산한 부인 아가를 보니, 정말 작았다. 많은 사람이 죽고 또 새로운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있구나 생각하며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귀하게 그리고 많은 이들의 기쁨과 축복으로(부족 안에서는 더욱 더) 이 세상에 나왔는데, 또 한쪽에서는 짐승 목숨보다 더 가볍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를 나오면서 방금 보르에서 왔다고 하는 유엔 한국군 3명의 장교를 만나게 되었다. 두 명은 아는 사이였다. 이들의 말이 보르 시내에는 죽어 있는 시체들이 그냥 거리에 여기저기 방치해 두고 있다고 했다. 딩카족인가보다. 이들은 적의 시신은 묻어 주지 않는다고 했다. 들까마귀들이 날아와서 죽은 사람을 뜯어 먹고 있는 것을 지난주 모그리에 가셨던 신부님이 사진을 찍어 온 것을 보았다. 함께 갔던 데레지냐수녀도 보았다고 했다. 묻을 수 없는 것은 땅이 딱딱해 팔 수도 없을뿐더러 군인들이 저쪽에 있기에 사건이 생길까 봐 그냥 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했다.
언젠가 이태석 신부님 책에서 읽을 것 같다. 남수단 청소년들이 평화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하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평화로운 때가 없어서 평화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상상이 안 간다는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뭣인지도 모르면서 부모를 따라 숲 속을 헤메었고 유엔 난민촌에서 살았기에 평화로운 마을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대주교님께서 얼마 전 회의하면서 말씀하시길 이런 상황이 보통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백번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아비규환 삶이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보통의 삶은 아니다. 누가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인가? 누가 이 상황을 거두어 갈 수 있겠는가? 나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는 게 지금 이들에게 가장 따뜻한 선물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제 막 새해가 밝아왔는데, 이 남수단 모든 백성들이 기쁜 한 해가 되는데 나는 어떤 몫을 해야 하는가? 그냥 다른 나라로 피난 가지 않고 이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나가서 길바닥에 뒹구는 시신을 들어 묻어 줄 수도 없고, 온갖 식량을 사서 배급을 해 줄 상황도 아니고 내일은 주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을 정해 주시리라 믿고 돌아오면서 보스코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집에 옷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동안 일본에서 한국에서 휴가 다녀오면서 가져온 옷들을 여기저기 나눠 주고 남은 모든 것을 난민촌에 가져가기로 했다. 이제부터 정말 바쁘게 생겼다. 주님이 함께할 것이니 힘이 솟으리라 믿고, 어디, 이 끝없는 대열에 참가해 보자. 저와 함께 가실 분 있으신가요?
남수단 선교사 류 치프리아나수녀 씀 / 2014년 1월 5일 오후에
(사진은 살레시오회 홈페이지 남수단 상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