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골고타 언덕 수난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구원의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신비로 많은 예수의 후예들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빛의 한 줄기였던 이태석 신부의
2006년 부활성야 강론을 되새겨봅니다.
(사진 2008. 3.22 부활성야)
2006년 4월15일 부활 성야(마르코 16, 1-7) 이태석 신부강론
기뻐합시다. 알렐루야.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절인 오늘은 최고의 축제일입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아름답게 온갖 치장을 다 하셨군요. 아마 파리의 패션쇼 무대도 이처럼 화려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창조주 예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아주 빛이 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덩그러니 남은 빈 무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건이지요. 예수님이 뽑으시고 함께 다닌 열 두 제자들. 이 제자들의 부활 전과 부활 후의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스승으로부터 끊임없이 죽음과 부활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진정으로 그 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야 부활을 믿고 그들의 모습은 달라졌습니다. 그 차이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정반대의 상황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것입니다. 저 역시 톤즈에 와 보지 않았다면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실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톤즈가 많이 좋아졌는데, 1999년에는 참으로 환경이 열악하고 비참하기 조차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런 톤즈에서 참으로 부활하셔서 살아 활동하고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이곳에 왔습니다. 제 삶도 부활한 것이지요.
부활전의 제 모든 일이 신학생으로 공부해서 말씀으로 들어 알고 있는 것이라면, 톤즈에서 에수님을 만나 그 말씀이 재조명 되었습니다. 그랬듯이 제자들도 빈 무덤을 보고 부활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프리즘을 통해 재조명되면서 모든 것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신앙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앙인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 생활 속에서 제자들처럼 나 자신의 부활로 꼭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빈 무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빈 무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선,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속에서 절망, 고통, 죽음이 차지하는 자리가 어떤 사건이나 계기를 통해 비워지게 되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 빈자리에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이, 그리하여 그 희망 때문에 가슴 벅찬 기쁨이 차오르면서 빈자리가 메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삶속에서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이켜 보게 되는 계기를 주면서 재조며을 하게 되며, 그제야 우리는 진실로 부활을 이해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간호 전문대 출신의 한 간호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실습 때 만난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집안의 엄청남 반대와 싸우면서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가정 생활에는 무관심하고 바람까지 피웠습니다.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아이를 낳으면 남편의 외박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로 출산을 했는데, 아이가 정신지체아로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로 인해 남편은 물론 시댁 식구들도 등을 돌리자 그녀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불행을 주시냐며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고는 아기와 함게 죽으려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녀는 떨어져 죽기 위해 낭떠러지에 올라서서 아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를 보고 좋아서 방긋방긋 웃었습니다.
그 아기의 웃는 얼굴을 보자 그녀는 두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그녀가 어린 시절 아플 때 쏟던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기에게 그와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스쳐가면서, 또 동시에 에수님의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인데, 내 십자가인 이 고통을 지기 싫어 죽는다면 내 십자가는 구원이 아니라 죽음의 십자가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요.
둘째로, 그런 생각을 하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가 온몸으로 이해가 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신의 것이 일치를 이루면서 자신도 구원의 십자가가 되어야함을 뼛속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실 것이며, 대신 짊어져 주실 것이라는 느낌 속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울고 난 그녀는 희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아기를 안고 낭떠러지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녀는 그 후 정신지체아 아기를 잘 기르면서 씩씩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느끼는 소중한 경험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은 것이지요.
우리 역시 고통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 안에서 빈 무덤을 보아야 하고, 마침내 주님이 살아나셔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내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 주실 것이라는 경험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고통조차도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은 우리 삶을 재생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음으로 엄청난 기쁨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 부활의 첫 발자국은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일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확실하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통 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과 항상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건이며, 그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해 부활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깨달아야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죽음의 길로 가게 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부활의 길로 가게 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최대의 명절인 부확절은 이런 십자가를 재조명해 보는 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십자가를 묵상합시다. 죽음이냐 부활이냐가 우리에게 던져졌다는 것을 묵상합시다.
사랑이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