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서 복사를 섰던 아프리카 톤즈의 15살 소년은 늘 이태석(1962~2010) 신부를 따라다녔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은 진료소로 변신했고 소년은 어깨너머로 이를 지켜봤다. 뜨거운 햇볕 아래 한참을 줄지어 서 있다가 진료를 받으며 행복해하는 환자들을 보며 소년은 의사의 꿈을 키웠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되고 싶다’는 18년 전 소년의 꿈이 한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수단어린이장학회 지원 받아
서른세 살 청년이 된 톤즈 소년, 토마스 타반 아콧(33)씨가 한국에서 의사가 됐다. 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백광현 신부) 지원으로 한국에 온 지 8년 2개월 만이다.
의사 국가고시 발표를 나흘 앞둔 19일, 고(故) 이태석 신부의 모교이자 아콧씨가 수학한 부산 부산진구 개금동 인제대 의과대학교에서 아콧씨를 만났다. ‘의사가 되어 남수단으로 돌아가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보고 달려온 토마스씨는 “수도생활 같은 시간이었다”며 웃어 보였다.
“2009년 12월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한국말을 한마디도 몰랐어요.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어요. 2년 동안 서울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부산 인제대 의대에 입학해서는 학교, 기숙사만 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한국에 오래 있으면서도 여행 다녀 본 곳이 없어요. 아침 일찍부터 새벽 두세 시까지 공부하는 힘든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신부님을 이해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한국 학생들에게도 어려운 의대 진학에서부터 졸업까지 과정이 아콧씨에게 수월할 리 없었다.
이태석 신부가 심어준 꿈
“이태석 신부님께서 한국에 공부하러 오겠냐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바로 가겠다고 했어요. 의사라는 꿈이 있었지만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몰랐고 더더욱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는데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 힘들었습니다. 원래 링가어(원주민어)와 영어, 아랍어를 쓰는데 한국어와 어법, 어순이 크게 달라요. 열심히 공부해 한국어 5급까지 따고 의대에 진학했지만, 의학용어는 무릎을 슬관절이라고 부르는 등 더 어렵고 낯설어 끊임없이 외워야 했습니다.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공부가 더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힘든 유학 생활 중에서도 아콧씨를 일으켜세운 건 확고한 목표와 주변인들의 도움이었다. 학교는 방학 때면 보충수업을 마련했고 동기생과 룸메이트를 연결해줘 학습을 돕도록 했다. 이태석 신부와의 인연들, 수단어린이장학회, 살레시오 수도회가 아콧씨를 도왔고 고향의 가족들도 응원을 보냈다.
“제가 8남 2녀 중에 다섯째인데 나약해질 때마다 집에 전화하는 걸 아니까 형제들은 늘 ‘우리 걱정하지 말고 공부에만 열중하라’라고 다독여줬어요. 집이 그리울 때면 이태석 신부님 친구인 대전교구 박진홍 신부님의 부모님이 아들처럼 챙겨주셨고요.”
외과전문의 되어 고향으로 가고파
매일 단 하나의 기도, ‘한국에서 무사히 의사 공부를 마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를 바쳤다는 아콧씨에겐 아직 국가고시와 인턴, 레지던트 과정이 남았다. 외과 전문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똑똑한 의사보다 환자를 잘 챙기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환자의 불편한 부분을 잘 들어주고, 진료 해주고, 희망을 주는 의사. 이태석 신부님처럼요.”
제2의 이태석 신부를 꿈꿨던 소년은 제2의 토마스 타반 아콧이 나오길 꿈꿔본다.
“한국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잖아요. 남수단 아이들의 꿈이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은재 기자 you@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