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어 줌
이태석 신부님은 남수단을 찾아온 수원교구 ‘피데이 도눔’ 선교사제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지는 ‘용기’였고 ‘힘’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존재만으로도 보화 같았을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이겨내신 고난의 시간들, 어려움들, 위기의 순간들이 신부님께는 반짝 반짝 빛나는 훈장이었고 저희들에게는 반석같은 디딤돌 이었습니다. 톤즈에 계셨던 신부님은 딩카 청년들의 친구였고 친구 이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하신 말씀처럼 이태석 신부님께서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로 스스로를 낮추어 딩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목숨인 소중한 시간과 재능을 딩카들을 위해 쏟아 부으셨습니다. 필요하면 배우고 익혀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루는 어느날 룸벡에서 만났는데 얼굴이 새카맣게 타서 오셨습니다. “아니 신부님 갑자기 얼굴이 이렇게 타셨어요?” “톤즈의 수도원 대문이 떨어져 나가서 붙이느냐 용접을 했어요.” “용접을 잘하세요?” “아니요, 용접을 잘 못하니까 이렇게 새카맣게 탔지요.”하시며 껄껄 웃으셨습니다. 수단에서는 필요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수단에서 겪는 심각한 ‘가난’은 그 일을 할 ‘사람’과 ‘도구’를 구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난의 친구가 되어줌은, 친구가 필요한 일들을 함께 나누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멀리서서 미소 짓거나 용기를 내라고 말만 하는 친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서 힘든 일과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참된 친구입니다. 그는 친구가 어려움과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연대’였습니다. 벗을 위한 연대는 친구를 위한 사랑과 선함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입니다.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따라 친구를 위해여 자기를 잃을 각오로 임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선 그렇게 남수단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살레지오회의 영성은 돈보스꼬 성인의 깊은 사랑과 열정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또한 살레지오 수도회 사제로서 성인의 영성을 깊이 묵상하고 따랐음은 신부님께서 늘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셨고 항상 함께하셨고 언제나 그들과 기쁘게 대화하셨던 모습 속에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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