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와 벗들의 연대
‘ 이태석 신부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수단 어린이장학회의 존재뿐만 아니라 남수단에 수원교구 선교사제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신부님의 선종이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의 감동과 눈물도 없었을 것이고, 그로인해 가까워진 남수단도 없었을 것이고, 남수단에 파견된 재건 지원 부대인 한빛부대에 천주교 신자가 많다는 사실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남수단과의 연대는 당신의 삶을 통해 내어주신 ‘선물’이었고 당신은 이러한 연대의 분명한 ‘시작’이요 ‘열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님의 열정과 존재적 선물에 대한 ‘감사’는 마땅하고 당연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았으면 그 열매를 맺게 한 ‘나무’를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신부님께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의사’로서, 인류애를 실천하려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남수단에 가신 것이 아니라, ‘살레지안 선교사제’로서 ‘세상 끝가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신 사제로 남수단에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제로서 실천하신 사랑과 말씀의 주인공은 주님으로 고백하신 예수님이시라는 정체성은 분명하고 확고하셨습니다. 따라서 이태석 신부님을 의사요, 음악가요 해외 자선사회사업가로만 보려 한다면 열매의 단편만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한 마리의 제비였지만 그를 따라온 많은 제비는 그 땅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단순한 전령에 머물 뿐 땅과 세상의 변화를 이끌지 못하면 일회적 ‘사건’으로 종결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죽음은 일회적 사건이 아닌, 이 시대의 ‘새로운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일회적 사건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이끌어가는 구원의 혁명이 되듯, 아프리카 대륙을 바라보라는,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실천해야 한다는 메시지의 ‘자각’이 봄을 이끄는 변화의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자각은 변화의 시작이 되어야 하며, 그 변화는 ‘자선’이 아니라 ‘회개’가 되어야합니다. 그것은 남수단의 가난한 이들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부자였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존엄함 인류로서 그들이 겪고 있는 가난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열매는 ‘동정’과 ‘희사’가 아닌 형제애에 기인한 ‘연대’여야 합니다.
연대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행위이기에 가난과 고통을 겪는 이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려 는 의지의 실천입니다. 그 연대는 식량과 재화를 나 자신만을 위해 모아두던 이들이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을 통해 다 나누어 주심을 보고, 자신들도 주위의 가난한 이웃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기 시작하는 ‘실천’입니다. 또한 성공적 삶을 위한 분주함으로 집 문간 앞에 놓인 종기투성이의 거지 라자로를 보지 못했던 부자가 자신을 위한 ‘분주함’을 버리고 자신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라자로를 돌보기 ‘시작함’입니다.
연대는 세상을 새롭게 바꾸려는 투신이며 노력입니다. 연대를 꿈꾸는 혁명가가 세상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없다면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물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태석 신부님께서 당신의 삶과 사랑으로 진정 바뀌기를 바라는 세상은 남수단이며 동시에 한국이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함께 하는 꿈, 성장하는 연대
자신을 위한 성취가 꿈의 전부인 사람은 자신이 꿈꾸던 것을 성취하는 순간 오히려 꿈을 잃어버리게 되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만족’을 누리지 못할 때 사랑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연대는 함께 꿈을 꾸는 것이고 내가 만족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기뻐하는 꿈을 이루려는 노력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는 그렇게 ‘함께’ 남수단의 친구가 되는 꿈을 꾸고 싶어 하셨습니다. 남수단의 가난한 어린이들이 소외되고 버림받는 현실을 ‘나의 현실’로 여기며 함께 아파하고 서로의 작은 꿈을 함께 이루어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깊고 깊은 아프리카 대륙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실천하는 연대는 아직도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아직도 겨자씨와 같은 인류를 향한 형제애와 연대의 사랑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2014년 2월 4일
한만삼 하느님의 요한 신부